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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7월 한신대·연세대·고려대 등에서 해직당한 교수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세운 갈릴리교회 첫돌을 맞아 축하의 촛불을 끄고 있다. 왼쪽부터 필자,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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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6-4
예수는 부활하자마자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갔다. 갈릴리는 예수 운동이 일어난 가난한 민중들이 사는 땅이었다. 우리들은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신학을 하는 교회를 ‘갈릴리교회’라고 부르기로 했다. 갈릴리 교회는 해직 교수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세운 ‘예배당 없는 교회’였다. 함께 뭉쳐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날 해직교수들을 모두 방학동 우리집으로 초대했다. 성서 번역을 하느라고 한신대를 떠나 있던 형 익환도 함께한 그 자리에서 나는 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은 1975년 7월17일이었다. 새벽의 집 총무인 최승국이 교섭을 해서 명동에 있는 흥사단 대성빌딩에서 20명 정도가 모였다. 당회장으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첫 인권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지낸 원로 이해영 목사를 모시기로 했다. 그는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를 정도로 병마에 시달리는 분이어서 당국이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해영 목사의 설교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항상 세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바른말을 할 준비요, 둘째는 감옥에 갈 준비, 셋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작으나마 나름의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우리가 76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그는 돌아가셨다. 그는 병중이었음에도 자신의 이름을 3·1 사건에 올리지 않은 것을 매우 섭섭해했다고 전해들었다. 그런데 갈릴리교회의 두번째 주일에 대성빌딩에 갔더니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6개월 동안 빌리기로 계약을 했음에도 당국의 압박으로 우리에게 건물을 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명동의 한일관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예배를 드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한빛교회의 이해동 목사를 찾아가 부탁을 드렸다. 그 후 우리는 감옥에 들락날락거리면서 10·26이 터져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매주 한빛교회에서 모였다. 갈릴리교회의 대표 설교자들은 안병무, 이우정, 이문영, 서남동, 문익환 그리고 나였다. 그 외에도 함석헌 선생과 여러 다른 손님들을 초청했다. ‘3·1’ 사건의 주역들이 다 갈릴리교회의 설교자였던 셈이다. 이 교회에서는 오후 2시 반이 되면 의자를 둥글게 놓고, 설교자도 높은 강단에서 내려와서 말씀을 했다. 예배 형식도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자유로운 것이었다. 한번은 당시 스님이었던 고은 시인이 왔는데 사회자가 그에게 기도를 부탁해서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신교, 구교, 때로는 불교도까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우리는 이문동의 판자촌에 있는 사랑방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부가 판자촌이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강제로 철거하는 바람에 뚝방촌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울 도심에서 날품팔이를 하면서 먹고살았기 때문에 시외로 쫓겨가게 되면 입에 풀칠을 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철거에 필사적으로 항거했다. 사랑방교회는 박형규 목사가 이끌던 서울특수지역선교위원회가 이곳에 들어가 세운 곳으로, 한신대 졸업생인 이규상 전도사가 천막에서 오갈 데 없는 12가구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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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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