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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31 18:59 수정 : 2008.10.09 18:15

1975년 8월22일 5일장으로 치러진 장준하 선생 장례식에서 영구 행렬이 김수환 추기경의 추도를 받으며 명동성당을 떠나고 있다. <광복 50년과 장준하-20주기 추모문집> 중에서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6-6

1975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의 사무실에서 우연히 장준하 형과 마주쳤다. 형은 대뜸 “문 형, 잘 만났군. 백만인 서명 운동에 서명해 주게” 하며 반가워했다. 나는 ‘또 감옥 갈 일을 꾸미는군’ 하며 내 이름 석자를 적어 넣었다. “이번에는 좀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해.” 이미 지난해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여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혐의로 옥살이를 했지만 그는 서명운동을 다시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는 요즘 등산을 다니면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게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8월17일 일요일, 갈릴리교회에 모여 있던 우리에게 장 형이 등산을 갔다가 추락사했다는 급보가 도착했다. 추락사라니!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와 익환 형, 그리고 복음동지회의 친구인 유관우 형은 다음날 포천의 약사봉으로 달려가 그가 발견됐다는 장소를 확인했다. 이렇게 험한 바위 봉우리에서 추락사를 했다면 많은 상처를 입었을 텐데 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그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그대로 똑딱거렸다. 그와 동행했던 사람들도 추락사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분개한 우리 셋은 상봉동 장 형의 집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그의 주검을 더 자세히 조사해 보았더니 양 팔꿈치에 푸른 멍이 들어 있는 것 말고는 상처가 없었다. 그런데 왼쪽 귀 뒤에 날카로운 것에 찍힌 구멍이 나 있었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 타살임을 직감했다. 팔꿈치의 상처는 두 명의 정보원이 끌고 가면서 생긴 것이고 목 뒤의 상처는 급소를 찌른 흔적임이 분명했다. 유관우는 가지고 있던 활동사진기로 주검을 자세히 찍어 부인 김희숙씨에게 주었다. 부인은 남편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미사를 드리기 위해 얼마 전에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어요. 자기는 구교건 신교건 다를 것이 없다면서 … 임시정부에서 사용했던 태극기도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했구요.”

나는 장 형을 1943년 일본 신학교에서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다. 불과 4~5개월을 함께 보냈지만 우리 둘 사이는 유달리 가까웠다. 나와 형은 일본군 징병을 피해 만주로 가고 그는 학도병에서 탈출해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을 했다. 그사이 서로 소식을 알 수가 없어 궁금해하던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47년 무렵 서울의 한복판 명동에서였다. 그는 명동성당 길목의 2층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말로만 듣던 그의 부인을 그날 처음 만났다.

나는 그에게 한신대에 편입해 신학 공부를 끝마치라고 설득을 했고, 복음동지회에도 끌어들여 같이 활동을 했다. 그는 내게 아들 결혼식 때 주례를 부탁했는데 그만 내가 늦는 바람에 함석헌 선생이 대신 했다. 미안하던 차에 딸의 주례를 다시 맡았을 때는 아침부터 서둘러 30분이나 일찍 가서 무사히 해냈다.

문동환 목사
49년 한신을 졸업한 이후 그는 정치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김구 선생을 모시고 광복군에 있을 때도 <등불>과 <제단>이라는 잡지를 편집했다. 서울에 와서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만들어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운동에 크게 기여를 했다. 박정희는 결국 70년 김지하의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사상계>를 폐간시켰다.

일제에 맞서서 싸웠던 장 형은 일본 관동군의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의 분노가 그로 하여금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했다. 그가 처음 감옥에 가게 된 74년 ‘긴급조치 1호’는 사실상 박정희가 그를 겨냥해 지시한 것이었다. 백기완과 함께 잡혀간 그는 간경화와 협심증이 악화되어 그해 12월 석방됐다. 소식을 듣고 백병원으로 찾아가니 본래 얼굴색이 흰 그의 얼굴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그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는 건강을 위해 등산을 시작했고, 주머니에는 늘 심장약을 가지고 다녔다. 혹시 자기가 쓰러지면 그것을 입에 넣어 달라고 적어서 매달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악화되는 건강도, 반복되는 옥살이도 그의 투쟁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익환 형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장례식은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을 했고, 김대중·김영삼을 비롯한 정치인과 민주 동지 2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장엄하게 치러졌다. 철저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산 거룩한 삶이었다. 그날은 우리 민족을 밝히던 등불이 꺼진 날이었다. 나에게는 각별한 친구를 떠나 보내는 날이기도 했다. 익환 형은 장준하의 영정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 죽는 날까지 책상 위에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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