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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03 18:53 수정 : 2008.10.08 18:19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된 민주 인사들의 부인들은 보라색 한복을 맞춰 입고 재판 때마다 다양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기습시위를 벌였다. 1976년 여름 필자의 부인 문혜림(왼쪽 세번째부터),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씨 등이 ‘공개 재판’ 구호를 쓴 부채를 들고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7-3

3·1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입소한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때 박세경 변호사가 찾아왔다. 감방에서는 변호사를 만나는 것만큼 마음에 안정을 주는 일이 없었다. 변호사와 면담을 할 때만큼은 교도관들이 감시를 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두어 주일이 지나면 재판이 시작될 것이라며 나에게 소신을 밝힐 준비를 하라고 일러주었다. 정부는 어차피 각본대로 재판을 하겠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이 기회가 우리의 뜻을 명확히 전달하는 자리라고 했다. 그는 이번 재판을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어 정치적으로도 퍽 의미가 깊다고 했다. 세계 교회에서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학생, 노동자들이 다시 일어나 긴급조치 9호를 철폐하라는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작은 행동이 꽁꽁 얼었던 얼음을 깨는 구실을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마침내 법정에 출두하라는 호출장을 받았다. 그런데 재판 당일까지도 변호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국에서 변호사들이 피의자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교도관의 밧줄에 끌려 재판을 받으러 가는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버스 안에 반가운 동지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버스 뒤에서 윤반웅 목사가 “문 박사!”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신흥교회 담임목사로 목요기도회를 열성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박정희와 그 일당을 물리쳐야 한다”는 식의 노골적인 설교와 기도로 당국의 미움을 샀다. 1974년 8월15일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저격을 당했을 때는 기도회에서 “하느님! 총탄이 빗나갔습니다”라고 외쳐 좌중을 웃게 하기도 했다. 선언문에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장소를 제공한 혐의로 구속된 함세웅·문정현·신현봉 신부도 버스에 올랐다. 그 후로 재판이 열리는 매주 토요일이면 우리는 반갑게 해후를 했다.

덕수궁 뒤 서울지법 마당에 내리니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경찰과 몸싸움을 하면서 ‘만세!’를 외치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람들 사이로 가족의 얼굴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법정 안에서도 감색 제복을 입은 경찰관 40~50명이 피고인석 바로 뒤에 앉아 가로막는 바람에 방청객들을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가족들은 경찰이 방청을 제한하는 것에 항의해 방청권을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우고 법정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 일에는 이해동 목사의 부인 이종옥과 내 아내 문혜림이 주동이 되었다고 한다. 부인들은 기발하고 재치있는 아이디어로 재판이 열리는 날마다 기습시위를 했다. 입에 검은 테이프를 십자가 모양으로 붙이고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민주회복’ 등의 구호를 적은 양산(파라솔)을 펼쳐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경찰은 당황해서 부인들을 버스에 태워 서대문경찰서로, 광화문으로 데리고 가서 재판이 끝나면 풀어주곤 했다. 한번은 보라색 원피스에 아예 재봉틀로 커다란 십자가를 박아 입고 나서서는 외투를 한순간에 벗어 보이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들이 시위를 하는 사진이 미군부대에서 발행하는 신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 1면에 실렸다. 그 바람에 당시 미군부대에서 알코올 중독자들 상담을 맡고 있던 아내는 군부대장에게 불려갔다. 그는 한국의 정치에 가담하면 직장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미국으로 송환될 수도 있으니 그만두라고 했다. 할 수 없이 시위를 그만둔 아내는 “나는 완전한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될 수 없군요”라고 쓸쓸해했다.

문동환 목사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제1심 재판은 1976년 5월4일 시작됐다. 박세경·이돈명·황인철 등 27명이나 되는 변호사들이 자원을 했다는 사실에 그렇게 마음이 든든할 수가 없었다. 변호인단은 재판의 공정성과 피고인 접견 금지 문제 등을 계속 항의했고 급기야는 ‘이것은 빌라도의 법정이다’라고 선언한 뒤 전원 퇴장을 했다. 변호인단은 김종필·지학순·김지하·김관석 등을 증인으로 요청하였으나 묵살됐다. 김대중 선생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가장 잘 아는 박정희를 증인으로 요청했다. 검사와 재판관들은 크게 당황해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어처구니없는 불법 재판이었지만 피의자들인 우리에게는 즐거운 축제의 장이었다. 판사와 검사들은 기가 죽어 있었지만 동지들은 그 앞에서 너무도 당당하고 차분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피의자들이 모여서 함께 점심을 먹을 때는 잔칫집이 따로 없었다. 김대중 선생은 바깥 소식을 여러 방법으로 전해듣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큰 격려를 받곤 했다. 식사가 끝난 뒤 이태영 박사가 주선해서 마신 커피 한 잔은 기운을 돋워주는 영양제 같았다. 그 짧은 점심시간이야말로 다른 데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동지들의 진정한 친교시간이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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