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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동일방직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사건으로 반유신체제 운동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해 2월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이 끼얹은 똥물을 뒤집어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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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8-2
1978년 2월24일, 기독교회관의 금요기도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당국의 탄압으로 중단됐던 목요기도회는 우리가 ‘명동사건’으로 재판을 받기 시작하면서 다시 금요기도회로 열리고 있었다. 그날 동일방직 여성 노조원 5명이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펼침막을 들고 나와 울먹이며 호소했다. 동일방직은 66년 감리교의 여성 목사 조화순이 산업선교사로 파송돼 소그룹 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애초 보수적인 신앙을 전도하려고 공장에 들어갔던 조 목사는 오랫동안 묵묵히 ‘직공’으로 일을 배웠다. 이른바 ‘위장취업 1호’인 셈이다. 그러면서 그는 여성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겪으며 분노했고, 오글 목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신앙관과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이후 한국 여성 노동운동의 선구자로 투신했다. 조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지면서 72년 첫 여성 지부장이 뽑혔다. 흔히 명예욕에 사로잡힌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성실하고 겸손하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했고, 노동조합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75년 이영숙 지부장이 당선되자 회사에서는 그를 기숙사 방에 가두고 어용 노조원들을 앞세워 남성 지부장을 새로 뽑았다. 이에 여성 노조원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당국은 경찰을 동원에 강제 해산시키려 했다. 격분한 여성 노동자들은 옷을 벗고 있으면 설마 경찰이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반알몸으로 대응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어린 아가씨들이 옷을 벗고 시위를 했을까? 그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경찰은 반나체가 된 노동자들을 발로 차고 젖가슴을 만지면서 끌고 갔다. 78년 2월21일 정기총회를 위한 대의원 선거 날이었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양동이에 똥을 가득 담아 들고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투표하러 온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과 가슴에 똥칠을 해댔다. 놀란 여성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으면서 살지는 않았다!” 몸부림치며 항거했다. 그러나 끝내 회사는 여성 노조원들을 집단해고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려 다른 회사에 취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3월12일 인천 탑동 성당에서 열린 신·구교 합동 노동절 예배에서 조 목사가 동일방직 노조원들의 억울한 사연을 보고했다. 이를 계기로 3월21일에는 신·구교와 여러 단체가 함께 연대해 동일방직 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5월에는 기독교사회선교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 협의회의 위원장은 천주교의 지학순 주교였고, 내가 신교를 대표하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당시에는 도시산업선교회를 공산주의자로 몰고 있었기에 그 단체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인사가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는 게 좋겠다는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에 계셨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일선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느님의 발길에 채어 나는 노동운동에 점점 더 얽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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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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