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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14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23명의 재야인사와 정치인들이 한복 차림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이문영·문익환·김대중씨, 뒷줄 예춘호·한승헌·고은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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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9-1
1979년 12월 마지막날 서대문 구치소에서 나온 이후 나는 이문영, 예춘호, 한완상, 박종태 등과 가깝게 지냈다. 우리는 앞으로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하려고 했다. 예춘호는 본래 박정희가 주도하는 공화당에서 사무총장까지 지낸 유능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3선 개헌 때 박정희에게 반기를 들고 박종태와 같이 공화당을 탈퇴하여 김대중 진영으로 들어왔다. 김대중 선생은 그를 높이 평가해 비서실장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는 민주제도연구소의 이사장직을 맡았고, 이문영 교수는 소장을 맡았다. 나중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모두 잡혀갔을 때 이 교수 수첩의 메모 내용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김대중 선생을 도울 구상을 메모하면서 나를 주미 한국대사 후보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나는 여러모로 보아 김대중 선생이 가장 대통령 자격이 있는 분이라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학교에서 추방을 당했을 때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또한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같이 감옥에 간 동지이기도 해서 그를 돕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80년 초 몇 달 동안 동교동 주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해직교수 23명과 제적학생 373명이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김대중 선생은 그때부터 우리에게 학교에 돌아가지 말고 자신과 같이 정치를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에게는 학생들과 정을 나누던 학원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컸다. 5년 만에 돌아가는 한신대, 나를 신학교로부터 추방한 독재자가 역사의 심판을 받았고, 나는 당당한 승리자로 교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제는 서구에서 배운 학문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체험으로 깨달은 것들을 학생들과 나누면서 앞으로 갈 길을 모색하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었다. 수유리 정문을 들어서는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 젊은 교수들과 학생들, 직원들이 한결같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반겨주었다. 복교한 지 한달쯤 뒤인 4월 유럽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주관하는 ‘예배와 교육 위원회’에 참석하러 네덜란드로 출장을 갔다. 박정희 정권 때 여권을 내주지 않아 참석을 하지 못했는데 세상이 바뀐 덕분에 마침내 가게 된 것이었다. 위원회에서는 주로 어린이들도 성찬에 참여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토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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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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