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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8 18:54 수정 : 2008.10.08 18:16

1982년 미국으로 이주해 온 한신대 출신들과 함께 워싱턴 수도교회를 세워 목회 활동을 시작한 필자가 그해 겨울 교인들과 친교의 시간에 아내 문혜림과 춤을 추고 있다.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9-3

“문 목사님은 구원을 믿으십니까?” 어느 날 한인 여성이 다가오더니 당돌하게 물었다. 깜짝 놀라 “그럼 구원을 믿지 않는 목사가 어디에 있어요?” 했더니 그는 안심한 듯 우리 교회, 내가 맡고 있던 워싱턴 수도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구원을 믿지 않는 ‘정치 목사’라는 소문이 한인 사회에 쫙 퍼져 우리 교회에 나오기를 주저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여성은 바로 이재정씨로, 1960년대 한국에서 ‘왈순아지매’ 연기로 인기 있던 배우였다. 그는 수도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목사님, 이제 구원이 뭔지 알겠습니다” 하고 신앙고백을 했다. 그 날 미국 무기회사들이 워싱턴에서 세계를 대상으로 무기전시회를 열자 워싱턴의 교회협의회는 전시회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면서 ‘온세계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억 명인데 무기 판매는 죄악!’이라며 항의시위를 했다. 우리 교회 여신도들과 함께 참여한 그 시위 현장에서 그가 구원의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훗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가 화재사고로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뉴욕의 스토니 포인트에서 일년을 보낸 뒤, 81년 여름 워싱턴으로 이사를 갔다. 아내가 하비 목사의 주선으로 ‘한국의 인권을 위한 북미주연합’에서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옮겨 오자 동지들은 목요기도회를 시작했다. 김응태·심기섭·박문규·서유응·하경남·박백선·이용진과 그 부인들이었다. 한신 졸업생인 강요섭 목사 부부와 제자인 곽분이도 함께했다.

수도교회는 이 모임이 점차 발전해 82년 탄생했다. 민중신학의 시각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로 한 우리는 처음엔 워싱턴 시내의 미국 교회를 빌려 일요일 오후에 예배를 드렸다. 워싱턴에서 내가 교회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수도교회에서는 교회의 상징물인 깨진 지구를 짊어진 지게 그림을 걸개로 만들어 보내주기도 했다. 유학생이었던 유영재와 김기봉, 훗날 한국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정동채와 이신범 부부도 교회에 나왔다.

우리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소에서 배식 봉사를 하기도 하고, 백악관 앞에서 약소민족들을 위한 시위에도 참여하곤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는 물론이고 대만과 필리핀의 민주화를 위한 행사에도 연대했다. 그런데 이 시위에서 한번은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필리핀 집회에서 격려 연설을 하고 내려왔더니 한 흑인이 내게 깍듯이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문 목사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라면서 말이다. 알고 보니 그는 나를 통일교의 문선명 목사로 착각한 것이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종종 겪게될 소동이었다.

83년 8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명연설을 했던 워싱턴대행진의 20돌을 기념하는 대행진에 참여한 감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미시시피의 거리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노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63년 킹 목사가 그 유명한 연설을 하던 그 자리에 나도 있었던 까닭이다. 그 때 갑자기 장인이 돌아가셔서 워싱턴에 왔더니 수만 인파가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인종 박람회와도 같이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흑인 영가를 부르며 평화롭게 행진을 하고 있었다. 나도 두어 시간 행렬을 따라와 링컨기념관 앞에 자리를 잡고 앤드류 영과 제시 잭슨 목사, 케네디 상원의원 등의 열띤 연설을 들었다. 맨 마지막에 연단에 올라와 피를 토해내는 듯 연설을 하던 킹 목사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사람들을 휘감았다.

문동환 목사
‘한국 민주회복 통일추진 국민회의 미주본부’ 결성도 워싱턴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동안 각각 운동을 해 온 ‘한민통 미주본부’와 ‘국민연합 미주본부’가 82년 나를 비롯한 본국 동지들의 참여를 계기로 서로 힘을 합하기로 했다. 내가 회장을 맡고, 한완상·정의순·김윤철 세 분이 부회장, 사무총장은 최성일이었다. 고문에는 김재준·김상돈·한승인 세 분을 모셨다. 우리의 첫 행사는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백악관 앞에서 한 시위였다. 한국 정치에 미국이 간섭하지 말라고 외쳤다. 83년 미얀마 아웅산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나 부총리 등 17명이 숨졌을 때는 주미 한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했다. 같은해 5월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가 민주화를 위해 결연히 단식 투쟁을 시작하자 우리는 거리시위로 미국 정부의 지지를 호소했다. 한국에서처럼 뜨겁게 달아 오르지는 못했지만 미국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내 생활은 퍽이나 분주했다. 그렇지만 늘 마음의 절반은 고국에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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