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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21 18:49 수정 : 2008.10.08 18:16

1980년 5월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이던 김대중씨가 82년 12월23일 서울대병원 구급차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미국 망명길에 오르고 있다. <조선일보> 사진

문동환-떠돌이 목자의 노래 9-4

“다니엘을 사자 굴 속에서 건지신 하느님은 김대중 선생을 악랄한 독재자 전두환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1982년 12월23일 저녁 워싱턴 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선생을 맞는 자리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추진연합의 위원장이었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환영사를 했다. 그에게 사형선고까지 내렸던 전두환이 국제적인 여론에 밀린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의 압력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다음 신병 치료 명목으로 미국행을 허용한 것이었다. 그의 방미는 워싱턴은 물론 미국 전역의 한국 민주화 운동에 광풍을 몰고 왔다.

김 선생의 가족은 닉슨이 도청사건을 일으켰던 워터게이트 아파트에서 머물렀다. 이 아파트는 그 명성에 비해서 그리 호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그가 도착한 다음날부터 아시아 문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을 비롯한 언론인들과 정치가들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내가 동석해 통역을 하며 대화를 도왔다. 그중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하원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이었다. 특히 김 선생이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해서 물었을 때 프레이저 의원은 종종 그 비서관들에게 대신 답하게 했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 성숙한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미국인들과 모임에서 나는 자주 ‘미국 정치도 중산층 이상을 위한 정치이며, 국제적으로는 약소국을 수탈하는 신제국주의’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김 선생은 “문 박사, 그렇게 미국 욕만 하면 안 돼. 한국에 이롭지 않아” 하고 충고를 했다. 그러면 나 역시 “김 선생은 정치가이기에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나는 목사이기에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말해야 합니다”라고 되받곤 했다.

한국인들도 김 선생을 자주 찾아왔는데 오랫동안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한 박권상 선생도 그중 한 분이었다. 그분은 조용한 성격의 지성인이어서 김 선생과 기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김 선생도 속에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아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선거 때 밤잠을 잊은 채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세하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차에서 토막잠을 자면서도 대중들 앞에 나서면 그렇게 신이 났다고 했다. 그는 마치 정치에 신이 들린 사람 같았다. 나와 동지들이 봄이 되면 메릴랜드의 유명한 정원으로 꽃놀이를 가자고 유혹하기도 했으나 그는 끝내 ‘중요한 일이 있다’며 마다했다. 딱 한 번 그를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은 인도의 평화주의자 간디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러 간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라면 실내에서 화초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80년 5월 내란음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교도소장의 특별 허락을 받아 옥사 앞 자그마한 화단에서 화초를 기르기 시작했다. 죽음의 그림자 밑에서 사는 그에게 매일 새롭게 자라나는 생명을 보는 것이 그렇게도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씨앗이 땅을 뚫고 나와 싹이 되고, 그 싹이 자라나 잎과 꽃을 피우는 그 생명의 신비로움을 관찰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그 후부터 그는 화초 가꾸는 데 심취하게 되었다.

워싱턴에 있을 때 김 선생의 둘째아들 홍업이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부의 아버지가 사정이 있어 한국에서 오질 못했다. 김 선생의 부탁으로 나는 ‘땜장이 아버지’가 되어 그날 신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나는 수도교회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열린 그의 강연회에 같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최성일 박사를 통역자로 추천했다. 그는 6·25 때 북으로 끌려간 영화감독 최인규의 아들로, 뉴욕주 호바트윌리엄스미스대학의 정치학과 전임교수였다. 그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열정과 천재적인 어학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한국어는 물론이거니와 영어도 미국인들보다 더 잘했다. 그는 자그마한 키에 늘 청바지를 입고 군화를 신고 다녀 히피족 같았다. 김 선생을 수행할 때는 어쩔 수 없이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다녀야 했지만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지성인들에게 한국의 사정을 바르게 알려야 한다”며 <한국의 벗>(프렌즈 오브 코리아)이라는 소식지를 만들어 미국의 대학 도서관에 무료로 배부하고자 했다. 미국 신문에는 한국 뉴스가 별로 보도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인들에게, 특히 지성인들에게 바른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와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을 이 소식지의 책임자로 내세웠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월급을 쏟아붓고 부족할 때면 애틀랜틱시티의 도박장에 가서 갬블링을 해서 충당을 했다. 그는 확률의 원리를 잘 이용하면 돈을 쉽게 딸 수 있다고 장담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번 돈으로 소식지를 전국의 도서관에 뿌렸다. 그는 나를 아버지처럼 따를 만큼 친숙해졌다.

문동환 목사
최 박사는 어느 날 김 선생이 영어를 제법 잘하니 그만하면 통역 없이 기자회견을 해도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사람들도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이라면 영어가 조금 부족해도 경청을 한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김 선생은 이따금 통역 없이도 기자회견을 멋지게 하곤 했다. 한번은 유명한 뉴스 앵커인 테드 코플과의 심야 인터뷰를 통역 없이 농담도 해 가면서 멋지게 마쳤다. 테드 코플이 대화를 끝내려고 하자 김 선생은 손을 들어 한마디 더 할 게 있다며 자기 소신을 펼치기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김 선생의 영어 실력은 장족의 발전을 했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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