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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18 18:40 수정 : 2009.01.18 18:40

1965년 발표한 단편소설 <분지> 때문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작가 남정현씨가 67년 5월2일 1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사상 첫 문인 필화사건이자 필자가 시국사건 변론의 가시밭길로 들어선 첫 사건이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11

검사 경력 5년 정도로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었다. 주위에서 걱정해주는 분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검찰의 고위직 한 분은 퇴임 인사를 하러 간 나에게, 변호사 하기 힘들면 다른 생각 말고 자기한테 전화 한 통만 하고 다시 돌아오라고까지 했을까.

나의 변호사 전신(轉身)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내 나름으로는 의미 있는 결단이었다. 고액의 보수가 묻어오는 큰 사건이나 흔히 말하는 전관예우는 구경도 못 했지만, 그러나 나는 자신의 선택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내가 재야 법조로 나온 1965년은 유난히 격동이 심한 한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대일 굴욕 외교에 분격한 한일협정 반대투쟁, 월남 파병,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 등을 놓고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는 반정부 투쟁이 격화되어 갔다. 군 내부의 반정부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었는가 하면, 그해 5월 초에는 문학인들의 반정부 시국선언이 나왔다.

바로 그날, 작가 남정현씨가 ‘기관원’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다. 을지로 3가에 있는 ‘충일기업사’라는 곳이었다. 당시 공포와 탄압의 본산으로,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린다는 중앙정보부의 분실이었다. 기관원들은 불문곡직하고 험하게 대들었다. “네가 쓴 것처럼 되어 있는 <분지>라는 소설은 네가 쓴 것이 아니고, 누가 써준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그 자의 이름을 대라”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대지 않으면 살아 나갈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했다.

<분지>라는 소설은 당시 문학잡지 중에서 가장 무게가 있던 <현대문학> 3월호에 실린 남정현씨의 단편이었다.

기관원들은 남씨의 몇 작품을 싸잡아 들이대면서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북괴의 대남 전략에 편승하여 철저하게 반미 반정부를 선동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해 7월9일, 남씨는 마침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 소설이 발표된 지 넉 달 뒤의 일이었다. 애초 <현대문학>에 발표했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 후 <통일전선>이라는 북한의 한 기관지에 그 작품이 전재되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설의 내용은 어떠했던가? 거기엔 활빈당의 수령 홍길동의 10대손이라는 홍만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독립투사인 아버지는 8·15 해방이 되고 나서도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미군한테 겁탈을 당해서 미쳐버린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온 만수는 생계조차 암담하였고, 여동생 분이는 미군 상사 스피드와 동거하면서 학대를 받는다. 이에 격분한 만수는 마침 한국에 온 스피드 상사의 아내를 향미산으로 유인하여 보복성 겁탈을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펜타곤(국방부)은 미사일부대를 동원해 향미산을 포위한 뒤, 폭파하겠다고 위협을 가한다. 만수는 한 폭의 깃발을 만들어 자기가 차지했던 그 여자의 배꼽 위에 그것을 꽂는다. 이처럼 우화적인 소설 한 편을 놓고, 검찰조차도 이를 계급의식과 반정부 의식을 고취하고 반미 감정을 조성함으로써 북괴의 대남 전략에 동조하였다고 주장했다.


한승헌
작가는 같은 달 24일 구속적부심사에서 일단 풀려났다. 그러나 서울지검 공안부의 김아무개 검사는 거의 1년 동안, 남씨를 오라 가라 하며 사건 처리를 미루면서 해를 넘겼다. 그리고 다시 계절이 바뀌어도 이 작가의 시달림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 무렵, 소설가인 안동림 형이 찾아왔다. 그는 남씨 사건을 말하면서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찬동을 하고 변호인으로 나설 채비를 했다. 안 형은 작가로서뿐 아니라 영문과 한문 가릴 것 없이 번역도 많이 하는 편이어서, 노먼 메일러의 <나자(裸者)와 사자(死者)>며, 중국의 <장자> 등 자기가 번역한 신간을 내게 갖다 주기도 하였다. 그는 매사에 열정적이었고, 불의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나는 안 형의 권유에 공감을 하고 <분지> 사건의 변호인이 되어, 시국사건(또는 필화사건) 변호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 후 얼마나 긴 대장정의 험난함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은 짐작도 못한 채, 그저 터무니없는 용공 혐의에 짓눌린 한 작가의 수난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검찰에 변호인 선임계를 냈던 것이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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