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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3월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총회에서 결의문을 읽고 있는 필자.(오른쪽) 초대 이사장인 김재준 목사(가운데)와 함마베르그 앰네스티 국제집행위원회 위원장(왼쪽)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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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1
과거 1970, 80년대 군사정권 아래서 사형, 고문, 불공정한 재판, 부당한 수감자 처우 등이 횡행했을 때, ‘앰네스티’로 약칭되는 국제인권기구가 항의하며 나서곤 했다. 지난해 ‘촛불집회’에 대한 경찰의 과잉 진압이 문제되었을 때도 그 조사단이 서울에 와서 주목을 끌었다. 대체로 인권 탄압을 하는 정부는 ‘앰네스티’란 단체를 좋아하질 않는다. 1961년에 창설된 이 기구는 런던에 본부를 두고 활동해 왔다. 이 국제기구가 한국에 깃발을 올린 것은 72년 3월 28일이었다. 나는 그 때 창립회원의 한 사람으로 발기단계부터 참여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하기까지는 누구보다 첫 발의자인 윤현 목사의 착안과 노력이 큰 촉매가 되었다. 그와 나는 서로 협조해 출범을 이끌었다. 나는 새 기구 창립에 필요한 문건 작성, 참여 권유, 인선 협의, 연락, 회의 진행 등에 일조했다. 서울시청 앞 뉴코리아 호텔에서 열린 창립총회에는 문동환 목사, 리영희 교수 등 학계·언론계·종교계·법조계·문단·여성계 등 각계 인사 25명과 함께 앰네스티 런던본부의 국제집행위원장도 참석했다. 그날 뽑힌 임원은, 이사장 김재준(목사·전 한신대학장), 전무이사 윤현(목사), 이사 양수정(언론인)·민병훈(변호사)·한승헌(변호사) 등이었고, 이병린(변호사·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역임), 함석헌(<씨알의 소리> 대표), 지학순(천주교 원주교구장·주교), 양윤식(대한변협 회장) 네 분을 명예회장으로 모셨다. 그 무렵의 정세는 전반적으로 탄압이 심해져 인권상황은 그야말로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유신 반독재 투쟁과 정치적 탄압이 서로 얽혀 시국사범 내지 양심수가 격증하게 됨으로써 앰네스티의 이념과 활동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다시 말해서 앰네스티가 내세운 양심수 구원, 사형 폐지, 고문 철폐, 공정한 재판, 수감자 처우 개선 등이 꼭 한국의 인권상황을 두고 나온 처방 같아서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이다. 압제적 상황 속에서도 회원 확충이 제법 순조로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으며, 한국앰네스티가 정치적 탄압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의 본산처럼 보이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한국앰네스티는 신생 조직의 취약점을 짧은 시일 안에 극복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우선 외국의 양심수 석방을 위한 탄원 엽서를 각국의 정부 수뇌들에게 보내는 운동에 나섰다. 학생들을 비롯해서 시국사범으로 구속된 사람들에게 내의 등 의복과 책, 그리고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수감된 사람들도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 때에 따라서는 변호 비용이나 가족의 생계 보조금을 도와주기도 했다. 재소자에 대한 부당한 접견 불허나 투약 치료의 부실에 대해서도 시정을 요구했다. 경비는 국내외에서 기탁되는 성금·지원금으로 충당했으며, 의류나 서적을 모으는 일에도 협조자가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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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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