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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04 21:15 수정 : 2009.02.12 20:00

변호사 사무실을 연 뒤 필자는 법정 밖 활동으로도 분주했다. 1970년 4월 문인친선축구대회 출전한 필자(오른쪽)가 대한축구협회에서 준비해준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문학평론가 곽종원(왼쪽)씨와 장덕진(가운데) 당시 대한축구협회장과 함께했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2

나의 재야 법조생활에는 개업 초의 황금기 같은 행운은 없었다. 세태가 지금과는 다르기도 했지만, 처음엔 법조 선배의 사무실 한쪽 공간을 할애받아서 쓰다가, 얼마 뒤 독립된 사무실을 마련하여 개인 법률사무소를 운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변호사 다섯이 모인 합동법률사무소의 일원이 되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투영되는 곳이 법정과 변호사 사무실이고 보면, 변호사도 별별 일들을 겪기 마련이었다.

먼저, 일반 사건이 주류인 법조동네의 낙숫거리를 더듬어 본다. 재판의 세계에선 소송의 결과가 좋으면 고맙다고 하고, 반대일 땐 서운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범상찮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 잘되면 자기가 잘한 결과이고, 잘못되면 변호사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약속한 착수금도 제대로 내지 않고 발을 끊는 사람도 있고 보면, 변호사는 사기 피해자 되기에 알맞은 직업 같았다.

어느 선배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형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된 사람이 변호사를 찾아왔더란다.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러 온 줄로 알고 반갑게 맞아주는 변호사에게 그 석방자가 하는 말인즉, 사건 수임 때 가족이 지급한 착수금을 반환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이건 나에게 애당초 죄가 없었기 때문이지, 있는 죄를 변호사가 없애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처는 내가 무슨 죄라도 지은 줄로 잘못 알고 돈을 갖다 준 것이니, 이제 그 돈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와 반대로 감동적인 이야기도 물론 있다. 내가 강원도 산골에 사는 한 주부의 보험회사 상대 소송을 맡아 2심에서 1심의 패소를 뒤집고 승소판결을 받아 준 적이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돌아가서 감사의 편지와 함께 이름난 동해안 최상품 오징어를 많이도 보내주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미담을 얹어 나누어 준 일도 있다.

1960년대만 해도 텔레비전(수상기)을 훔치는 도둑이 많았다. 어느날 법정에서 텔레비전을 훔친 죄로 잡혀 온 소년범의 국선 변호를 성심껏 해 주고 퇴근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밤, 우리 집에 양산군자가 들어와 안방 머리맡에 있던 티브이 수상기를 감쪽같이 훔쳐갔다.

민사법정에서도 진풍경은 있었다. 갓 쓴 노인이 변호사 없이 직접 당사자(원고) 본인 소송을 하는데, 판사가 주장 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대라고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증거는 무슨 증거? 온동네 사람이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증거가 또 필요하단 말이여?”라고 대드는 장면도 보았다.

나는 법정 밖에서도 할 일이 많았다. 주로 언론 쪽과의 관계였다. 법조계 유일의 전문지였던 <법률신문>의 논설위원으로서 사설을 쓰는 외에도 ‘법가’(法街)라는 단평 가십난을 혼자 맡아서 메꾸어야 했다. 거기에다 ‘한국법조방론’이라는 기획물을 연재하는 고역도 치렀다.


또 내가 소속해 있던 서울제일변호사회에서 <법조시보>라는 회지를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나중엔 대한변호사협회의 문화공보위원장이 되어 역시 또 기관지(잡지)를 편집·제작하는 부역을 잡히게 되었다. <법정>이라는 잡지에 ‘법창으로 보는 세계 명작’을 연재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일간지의 칼럼도 몇 군데 고정으로 썼다. 한국기자협회의 고문변호사이고 보니, 군사정권하의 기자들의 수난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중앙일보> 대전지사의 박영수 기자가 ‘여간첩 검거’ 기사를 특종했다가 오히려 반공법으로 구속되었다. 대전까지 오르내리면서 변호를 하는 가운데, 나는 언론계의 기대에 부응하여 웬만한 어려움은 참고 나아가자는 생각을 굳혔다.


한승헌 변호사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서 여당 의원들만으로 ‘3선 개헌’을 강행하던 시각, 그러니까 71년 9월 14일 새벽, 서울 태평로 국회 제3별관에서 번개처럼 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하는 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모 신문의 송아무개 기자가 여당 의원과 그 보좌관에게 폭행을 당하고 카메라가 부서지는 테러를 당했다. 나는 사진기자단의 요청으로 검찰에 송 기자를 대리하여 가해자를 상대로 고소장을 냈다. 그리고 담당 검사를 찾아가 엄중한 조처를 당부했다. 그런데 얼마 뒤, 송 기자가 고소를 취소했다는 기사가 났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변호사와 상의 한마디 없었음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이렇다 할 해명도 없어서 조금 의아스러웠다. 나 개인의 심정 문제가 아니라 언론인의 기본 자세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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