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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08 18:36 수정 : 2009.02.08 19:26

1972년 <다리>지 창간 2돌 기념 강연회에서 건국대 김준희 교수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론’을 주창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반공법’ 유죄판결을 받은 그는 5년간 해직 뒤 복직됐으나 80년 또다시 해직됐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4

한 대학교수가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주장했다가 반공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그 후 이 나라 대통령이 똑같은 주장을 하자, 이번에는 ‘일대 영단’이라는 칭송이 나왔다. 같은 말이라도 국민이 하면 범죄가 되고 집권자가 하면 영단이 되었다. 모순과 억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의 그런 ‘영단‘이 있고 난 뒤에도 대법원은 그 교수의 선구적 발언을 여전히 반국가 범죄라고 했다. 이건 희극이었다.

1972년 10월4일, 서울 명동에 있는 (지금은 없어진) 대성빌딩 3층 강당에서 강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월간 <다리> 부설 민족통일문제연구소가 <다리> 창간 2돌 기념으로 개최한 이 강연회의 연사는 건국대 김준희 교수였다.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분단국가의 통일 문제를 연구한 끝에 ‘한반도에 있어서 재통일 문제와 그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학자였다.

이날 그가 내건 연제는 ‘연방제 통일론의 문제점’이었는데, 함부로 통일론을 언급하기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주목을 끌 만했다. 그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론을 설명한 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엔 동시가입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조를 폈다.

강연장에 앉아 있던 내 생각에도 그의 말은 당시로서는 아슬아슬했다. 우선 북한 정권에 대한 호칭부터 달랐다. 북괴, 북괴 하던 시절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다니, 그것부터가 놀라웠다. 김 교수는 강연에서 북한에서 나온 각종 간행물과 전단을 내보이며, “여러분들은 이런 것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처벌을 받겠지만, 나는 정부의 허가를 얻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남북한 당국의 통일정책을 등거리에서 고찰하는 그의 방식은 정당하면서도 위험스러웠다. 그가 김일성을 ‘김일성 수상’이라고 부르자 “그따위 소리 하지 말라”는 고함이 청중석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래저래 파격적인 말이 숙출하자 장내는 다소 소란해졌다. 양식 있는 한 언론인조차도 김 교수의 ‘돌출 언행’에 의아해서 “당신, 혹시 미 중앙정보부(CIA) 첩자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 강연이 있은 지 이틀 뒤에 김 교수는 수사당국에 연행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0월17일 저 어이없는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김 교수는 1심에서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받았다. 나는 항소심에서 그의 변호인이 되었다. 그리고 김 교수의 학문적인 연구 발표를 왜곡한 1심의 오류를 지적한 뒤, 그가 강연이나 글을 통해서 주장한 ‘남북 유엔 동시가입론’이 결코 ‘북한 공산집단의 선전활동에 동조하여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도 무죄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만 3년간 집행유예로 몸만 풀려나왔다. 유죄 판시 사실 중에는 위에서 말한 강연 내용 외에도, <통일연구>라는 잡지에 ‘삼중 쇄국성과 우리 민족의 재통일 문제’라는 글을 실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논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냥 ‘이승만’인 데 비하여, 김일성 이름 밑에는 ‘주석’이라는 직명을 붙여 놓아서, 이런 점이 친북처럼 보이지 않았나 싶었다.

나는 그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해 놓고 고향인 전주에 갔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이른바 ‘6·23 외교선언’ 특별방송을 들었다. 73년 6월23일 오전이었다. 그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 김 교수의 상고이유서를 신나게 썼다. “피고인은 대통령보다 앞서 남북 유엔 동시가입론을 주장한 선구자인데, 상은 못 줄망정 벌을 줄 수가 있는가. 어느 모로 보나 김 교수가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했다는 원 판결은 뒤집혀야 마땅하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상고이유서를 끝맺었다.



한승헌 변호사
그러나 몇 달 뒤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상고 기각’이었다. 내가 쓴 장문의 상고이유에 대해서 “논지는 독단적 견해에 불과하다”는 단 한마디로 눈을 감았다. 정부의 억지에 사법부조차도 손을 들어준 셈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91년 9월, 남한이 북한을 설득하여 마침내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그렇다면 김 교수의 정당하고 담대한 주장은 너무 앞선 데에 잘못이 있었는가? 그 사건 담당 검사는 김 교수에게 “당신의 주장은 20년 뒤에나 실현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렇다면 예언자는 김 교수가 아니라 공안검사였다는 말인가.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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