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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10 18:11 수정 : 2009.02.11 09:57

1973년 4월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의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박형규 목사와 부인 조정하씨, 필자(오른쪽부터)가 밝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오고 있다. 이 사건은 한국 기독교계의 반독재 투쟁에 불을 붙였다.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6

규모나 의미로 보아 대단한 사건이 흐지부지 처리되거나 아예 묻혀 버리는가 하면, 반대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이 크게 부풀려져서 역사적 사건으로 격상하기도 한다. 그런 조작이 권력자의 정치적 탄압으로 기획된 것일 때는 이른바 ‘사건의 신학(神學)’이 되어 자업자득의 부메랑을 맞기도 하고, 당하는 쪽에 충격을 통한 각성의 계기를 안겨 주기도 한다. 내가 처음 변호한 기독교 성직자 사건이라 할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또는 ‘남산 야외음악당 사건’)은 그런 이치를 검증하기에 알맞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

예배 장소에서 불발에 그친 전단 살포가 ‘내란 예비음모’로 둔갑한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자충수에서 덧나기 시작했다. 우선 사건의 실상을 살펴본다.

1974년 4월 22일 이른 아침,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다. 여기서 ‘연합예배’라 함은 한국 기독교계의 소위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초교파적인 예배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날 예배가 끝날 무렵, 야외음악당 광장의 한 귀퉁이에 있던 몇 사람의 젊은이들은 신도들에게 전단을 나누어 주려다가 실패하고 이내 사라졌다. (그 전단에는 ‘회개하라, 위정자여’ 또는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날 그 현장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고, 소란이나 검거도 없었다.

 그로부터 60여일이 지난 6월 25일, 하찮게 보였던 그 ‘사건’ 관련자들이 육군 보안사령부의 속칭 ‘서빙고 호텔’로 붙들려 갔다. 10여명의 연행자 가운데는 서울 제일교회의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전도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60년대 말부터 도시빈민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벌여 온 터여서 유신정권의 미움과 감시를 받고 있었다. 연행자들은 천만뜻밖에도,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자백을 강요당했고, 그런 과정에서 심한 고문도 당했다.

 실인즉, 박 목사가 권 전도사에게 비용을 주어 현수막과 전단을 만들도록 했고, 예배 장소에서 이를 펼치거나 살포함으로써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시대적 사명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인데, 현장 사정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날 현장에 갔던 김동완 목사 등 11명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고, 박 목사와 권 전도사, 그리고 남삼우씨는 놀랍게도 ‘내란 예비음모’로 기소되었다.

 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인 김관석 목사의 요청으로 변호인이 되었다. 김 목사의 회고담으로는, 처음 어느 크리스천 변호사를 찾아가 사건을 맡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고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수락을 하자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것이 나와 한국 기독교의 만남이 되었고, 그 뒤 비신자이면서도 기독교 인권운동에 일조를 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의 변호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고인들은 그날 새벽 연합예배의 주최자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군중을 선동하여 내란을 하려고 했단 말인가? 하도 답답해서 나는 법정에서 박 목사님과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부활절 연합예배 참석자들은 무엇을 가지고 오는가?

   =찬송가와 성경을 가지고 온다.

   -혹시 흉기를 가지고 오지는 않는가?

   =그런 일은 없다. (방청석에서 폭소)

 그해 9월 25일 선고 공판은 이상하게도 비공개로 열렸다. 아무리 죄가 없어도 무죄가 날 수는 없었다. 박 목사와 권 전도사에게는 각각 징역 2년, 남씨에게는 1년6월이 선고되었다. 단 3분,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뜻밖의 실형이었다.


한승헌 변호사
 그런데 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판결 선고 뒤 이틀 만에 모두 보석으로 석방이 된 것이다. 무슨 곡절이 있었을까? 사연은 간단했다. 구속 재판에 격앙되어 기독교계가 거세게 항의하자, ‘기관’ 사람들이 진정하라며 판결 이틀 뒤면 틀림없이 풀어줄 것이라는 말로 회유를 했다는 것이었다. 비참하게 된 것은 법원이었다.

 이 사건은 피고인들의 항소로 서울고법에 올라갔는데, 기소 후 15년, 즉 재판 시효가 임박할 때까지 방치하다가 87년 6월항쟁 후에야 무죄 판결이 났다. ‘답’은 맞았는데, 시간이 지난 뒤에 낸 답안지였다.

 이 사건은 기독교계가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인권침해에 반대하는 조직적인 저항에 나서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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