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10월9일 수유리의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인간화’ 대화 모임을 마치고 참석자들과 함께 했다. 왼쪽부터 양호민 <조선일보> 논설위원, 필자, 이건호 이대 교수, 이항녕 고대 교수, 김용구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문영 고대 교수, 이극찬 연대 교수, 지명관 덕성여대 교수.
|
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7
나의 법정 밖 활동은 자연스레 법치주의와 민주사회, 그리고 언론자유 등 기본권 문제로 외연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나의 ‘기획’이라기보다는 외부 주문이 그런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그 예로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의 공개강좌(1972년 6월26일, 대성빌딩)에서 ‘필화사건과 창작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내 생각을 펼쳐 보인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걸리지 않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그 자체가 이미 창작의 자유를 녹슬게 한다. ‘좋은 작품’을 생각하기보다는 ‘말썽 없는 작품’으로 안일(安逸)을 탐할 때 문학정신은 위기에 들어갔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역설 같지만, 필화사건은 있어도 불행하고 없어도 불행하다. 앞의 경우가 규제자의 몰이해나 억압, 그리고 작가의 수난이 불행이라면, 뒤쪽은 작가의 무력이나 문학 부재의 반사적 안일일 수도 있어 불행이란 말이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불행에서 어느 만큼의 거리에 있는가? 전자의 불행보다 후자의 불행이 과연 더 가벼운 것인가?” 강원용 목사님이 이끄시던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내 지식과 사고의 갈증을 풀어준 깨달음의 배움터였다. 1970년대 초입부터 나는 수유리 산자락의 아카데미 하우스에 열심히 드나들며, 여러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대화 모임’이라든가 학술 발표, 당면 과제 토론 등에 한축 끼어 많은 ‘충전’을 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거시적으로 보는 안목을 길렀는가 하면, 학계·언론계·문화계의 많은 인사들과 안면을 트고 친분을 두터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모임이 아직 낯설던 초기에 ‘한국에서의 법의 현실 진단’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발제문의 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설픈 글이어서 부끄러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당시의 압제를 비판하는 말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의회제도에 대한 회의와 실망을 품기 시작했다. 금력과 관권에 의한 선거의 왜곡으로 참다운 민의가 의회에 반영되기 어렵고, 정당 내부에서 소수 지배가 자행되어, 민주적 토의보다는 소수 간부의 결정이 우선하게 되었으며, 이데올로기와 이해의 상반으로 극한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의회는 토론 타협 결정의 기능을 상실하고, 결국 다수결의 원리는 머릿수 본위의 산술유희로 변질되고 만다.” “인간에 대한 압제와 불평등을 퇴치시키기 위한 법이 오히려 그런 병리적 요소에 거짓 포장을 씌워주는 현실적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크리스찬 아카데미 <대화> 1970년 9월호) 5·16 이후 군사독재 아래서 법질서의 이름으로 억압의 합리화가 굳어질 때, 한 일간지에 ‘오해되는 질서관’이라는 칼럼도 썼다. “4·19 이후 사회상의 혼란을 무력으로 극복한 것을 질서의 회복이라고 말한다면, 혹은 도시의 교통정리나 학생 데모의 진압을 질서의 회복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가두질서’의 이야기에 그친다. 우리가 경계할 바는 질서의 이름 아래 독재와 강압, 그리고 인간 경시가 자행되기 쉬운 점이다.”(<중앙일보> 1970년 1월9일)가십거리가 될 만한 실화를 넣어 간접비판 기법도 시도했다. 가령 신문 칼럼으로 나간 ‘자동 인형’이란 글을 들 수 있겠다. “어느 해 세모, 고아원을 찾아 간 우리 일행은 어린이들에게 빵을 선물했다. 그때 손에 받아 든 빵을 입으로 직행시키려는 꼬마들의 충동을, 한 굵은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자, 빵을 든 채 양손을 위로 올리고 다같이 웃으면서 ‘야’ 하고 크게 소리쳐 봐요.’ 동행한 사진기자의 구령에 따라 “야” 하는 환성이 터지고 동시에 플래시가 번쩍했다. 기계나 하등동물이 아닌 인간에게서 꼭 획일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것을 요구하거나 조작하려 함은 더욱 어리석다.“ (<동아일보> 1973년 7월24)
|
한승헌 변호사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