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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6월 필자의 수상평론집 <법과 인간의 항변> 출판기념회에 여러 법조계 선배와 동료들이 나와 축하해 주었다. 왼쪽부터 이세중, 안명기, 이병호, 필자, 박세경, 강해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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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산민의 ‘사랑방 증언’ 28
나는 1972년 5월에 <법과 인간의 항변>이라는 책을 냈다. 그때까지 신문 잡지에 쓴 글을 모은 첫 수상 평론집이었다. 표지에는 쇠창살을 잡고 있는 두 주먹이 강렬하게 보이는 사진을 깔았는데, 실인즉 그 장면은 감옥이 아니라 정신병원 철창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법조인의 수상집이 매우 드문 때여서 호평을 받았다. 이제 다시 그 책을 펴 보니, 그중 짤막한 글 한 편에 얽힌 후일담이 머리에 떠오른다. 1967년 봄이던가, 한국을 방문한 얼 워런 미국연방대심원장이 대법원에 와서 연설을 했다. 내가 그 자리에서 들은 말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은 이러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 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물론 이 말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 ‘솔론’이라는 시인이 한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을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가슴에도 심어주고 싶었다. 마침 그 무렵 <동아일보>의 칼럼 고정 필진 제의를 수락한 참이어서, 그 첫 번째 원고에 ‘방관죄’(傍觀罪)라는 제목을 내걸고 글을 쓰면서 워런의 그 말을 인용했다. 지금부터 42년 전에 쓴 그 글의 한 대목을 옮겨 본다. “독일의 반전 평화운동자 오시츠키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그는 바이마르체제가 기울어질 무렵의 독일 군부를 통렬히 공격한 탓으로 여러 번 박해를 받았다. 그 판국에 대담하게도 그를 옹호하고, 석방운동에 앞장선 이는 저 유명한 작가 토마스 만 그 사람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악명 높은 ‘드레퓌스 사건’ 때엔, 작가 졸라가 ‘나는 규탄한다’라는 제목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고, 간첩 날조 의혹에 도전했다. (중략) 그런데, 이 나라의 ‘지성’을 자처하는 분들이 아직도 외면과 방관의 유리창 안에서 기체일향만강을 탐하는 예가 너무나 많다. 압제와 불의 앞에서 분노해야 할 때 구경이나 하는 지식인이라면 ‘죄인’이나 다름이 없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방관죄’라는 ….”(<동아일보> 1967년 9월28일) 그 글이 신문에 실려 나간 뒤 60대의 노인 한 분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가 모 지방의 판검사를 고소했으나 검찰이 부당하게 무혐의 결정을 했으니, 그런 잘못을 뒤엎도록 투쟁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그 노인이 법정에서 발언 제지를 당한 데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좀 하려고 하면, 판사나 검사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며 말문을 막는 통에 억울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조서를 보니, 말한 대로 적혀 있지도 않고 누락된 내용이 많았다. 노인은 담당 판·검사를 상대로 권리행사 방해, 직무 유기, 허위 공문서 작성, 동행사로 고소를 했으나, 검사가 제대로 조사도 않고 무혐의 결정을 했다는 것. 여기저기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모두 회피하고 있으니, 나보고 싸워 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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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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