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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08 20:03 수정 : 2012.01.08 20:03

2009년 6월10일 서울 성공회대성당에서 열린 ‘6·10항쟁 22돌 기념식’에서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는 박정기(오른쪽)씨와 김근태(왼쪽)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던 바로 그 자리다. ‘고문 피해자’로서 두 가족은 깊은 연대 투쟁을 해왔다. 사진 ‘올댓뉴스’ 제공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25

1985년 여름방학 때 ‘공장 활동’(공활)을 하며 철이(박종철)는 매일 밤 일기를 썼다.

“작업장 내의 조명, 환기, 위생 시설은 거의 0점에 가까울 정도다. … 점심시간 30분 외에 휴식 시간은 없었다. … 정말 가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축처럼 일을 시켰다. 피곤하다.”(8월2일)

“이제 겨우 3일째인데 벌써 일하는 것이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하루 종일 앉아서 계속 되풀이되는 단순노동이 사람을 굉장히 멍청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야말로 인간을 단순하게 만들면서 기계적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8월5일)

아들은 공활을 마치고 부산 집으로 내려왔다. 비쩍 마른데다 다 떨어진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다. 아내는 철이를 국제시장에 데리고 가 여러 벌의 옷을 사 입혔다. 그때 산 옷들마저 친구들에게 다 줬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2학기 개강을 앞둔 9월4일 새벽,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민청련은 학생운동 출신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83년 9월30일 결성했다. 신군부가 들어선 뒤 최초의 공개적인 민주화운동 단체였다. 민청련 결성 당시 김근태는 인천 산업선교회에서 노동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다.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을 거치며 신군부는 유화국면에서 탄압국면으로 전환했고, 첫 표적으로 삼은 민청련 관련자들을 잡아들였다.

김근태는 9월4일부터 20일까지 수십 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이때 고문으로 출소한 이후 20년 넘도록 후유증을 앓았고, 파킨슨병에 걸려 시달렸다. 그로부터 몇년 뒤 내(박정기)가 철이를 떠나보내고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참여하면서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과는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93년 말 우리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고문 피해자 문국진과 함께하는 모임’에 참여했다. 내가 대표를 맡았고, 인재근은 헌신적으로 모임을 이끌었다. 서슬 퍼런 80~90년대를 보내며 고문으로 고통을 겪은 이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 중 유독 세상에 알려진 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한 내 아들과 김근태였다.

2011년 12월30일 김근태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인재근과 가족들의 아픈 마음이 먼저 떠올랐다. 고문 피해자는 후유증이 깊어 자신이 겪은 일을 가족들과도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김근태의 떠남을 계기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을 생각하고, 우리 사회가 국가의 폭력에 대한 관심을 좀더 기울여주길 기대한다.

이 지면을 빌려, ‘민주화운동의 큰 별’ 삼가 김근태 의장의 명복을 빈다. 부디 고문 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시길 바란다. 김근태를 기억하는 일은, 고문 피해자들이 품은 뜻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다.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모든 고통의 현장에서 저항의 불길이 타오르는 새해가 되길 소망한다.

85년 10월12일에는 서울대생 우종원이 경부선 황간역 부근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우종원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의 수배자로 도피중이었다. 민추위는 서울대의 비공개 학생운동 조직으로,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를 결성해 미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주도했다. 우종원은 민추위의 간부로 유인물을 제작하고 시위 현장에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81년 입학한 우종원은 지하서클 활동을 한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이었다. 충북 영동경찰서는 우종원이 경부선 열차를 타고 가다 투신자살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숱한 의문을 남긴 죽음이었다. 팔순줄에 들어선 우종원의 어머니 이계남은 유가협에서 동고동락한 동지이다.

85년 2학기 들어 철이는 안양의 자취방에서 나와 학교 앞 신림동에서 서클 친구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하숙을 시작한 첫날 아침 룸메이트 친구는 하얀 서리가 낀 창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창문엔 철이가 손가락으로 쓴 구호가 적혀 있었다.

“군부 파쇼 타도하자!” “학원 안정법 결사반대!” “수입 개방 강요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다음날부터 두 학생은 아침마다 창문에 구호를 쓰고 하루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주로 듣는 편인 아들은 친구가 서운해할 만큼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데 인색했다. 이런 성격을 친구들은 나름의 운동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철이는 ‘학생운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엄격했고 말하는 데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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