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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세대 김예나(왼쪽부터)·김현진씨가 지난 14일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모제에 참가한 뒤 박정기씨와 ‘열사 정신’의 의미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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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2
2012년 1월14일, 아들을 잃은 지 25년째 되는 날, 박정기는 경찰청 인권센터(옛 남영동 대공분실)를 찾았다. 그해 겨울 낯선 형사들에게 끌려왔던 곳. 대공분실 앞에 서면 회한에 가슴이 저리다. 박종철열사기념사업회가 마련한 25주기 추모제를 마친 뒤 박정기는 두 청년을 만났다. 최근 <뜨겁게 안녕>을 펴낸 ‘하이힐을 신은 리얼리스트’ 김현진과 청년유니온 조합원이면서 박종철의 서울대 후배인 김예나 학생이다. 김예나는 22살, 박정기는 85살이다. 그는 젊은 청년들이 추모제에 참석한 소감이 궁금했다. 김예나가 먼저 답을 했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유가협 회장님께서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지만 국가의 폭력은 매한가지다’라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509호 조사실에 들어갔을 땐 공기가 참 답답했어요. 생각보다 굉장히 비좁더라고요. 공간의 비좁음은 정신의 비좁음, 숨막힘을 의도한 것 같았어요.” 김예나는 추모제에 오기 전 읽었던 박 열사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때가 80년대잖아요. 최루탄이 거리를 뒤덮은 사진을 보면 먼 이야기 같은데 박종철 선배께서 쓰신 편지를 보면 일상에서 겪는 일들이 비슷해 가깝게 느껴졌어요.” 그는 엄혹한 시절을 감당한 선배의 삶을 헤아리는 듯 추모제 내내 숙연한 표정이었다. 김현진은 이날 5층 조사실까지 계단을 오르며 어지럼증을 느꼈다. 박종철이 연행 당일 재갈이 물린 채 올랐던 그 좁고 가파른 원형 계단이다. “제가 다녔던 학교가 옛 안기부 자리여서 건물 구조가 익숙해요. 옛 교사 지하에 단행본 크기만한 창문이 뚫린 골방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죠. 거기서 뭘 했는지, 어떤 비극이 있었는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어요”1987년 김현진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본 신문기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빠에게 여쭈었다. “아빠, 탁 쳤는데 어떻게 억 하고 사람이 죽어?” 그의 아버지는 보수적인 성향의 목사였다.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도 안 하고 빨갱이 짓을 한다”고 나무라던 분이었다.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었고, 뜬금없이 심부름을 시키며 대답을 피하셨다. 그 시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박정기의 목소리가 있다. 임진강에서 아들을 보내며 외친 소리였다. “철아,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전 그 말이 어떤 다짐처럼 들렸어요. 늙은 투사가 되어 거리에 나서게 될 다음 인생을 예감하는 출사표가 아니었을까요?” 이번엔 두 청년이 박정기의 근황을 묻는다. 손주 보는 기쁨으로 산다고, 신나고 즐겁게 살아간다는 얘길 듣고 싶었단다. 그래야 아들을 고문한 자들이 싫어할 것이라고. “이번에 학생인권조례를 발의했잖아. 인권 상황이 나아지는 것을 볼 때가 제일 좋아.”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늘 관심을 기울이는 박정기다운 답변이었다. 김현진의 질문이 이어진다. “고문자들 중 혹시 나중에라도 찾아와 사과한 사람은 없나요?” “찾아온 사람들은 없지.” 잠시 말을 끊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박정기는 전직 대통령들에게 쓴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전두환·노태우가 석방되던 날, 그는 정신을 잃었고 부상을 당했다. “그런 세상이 어디 있나? 누구한테 물어보고 석방하는 거야? 그날 유가협에서 엄청 투쟁했어. 김대중 대통령이 안타깝게 돌아가셨지만 비판할 건 비판해야 돼. 젊은 생명들이 어떻게 죽었는데 덜렁 자기 맘대로 그럴 수 있어?” 지난해 박정기와 함께 유가협을 이끌어온 이소선 어머니의 소천은 또 하나의 아픈 이별이었다. 김현진은 이소선도 박정기도 자식들이 부모에게 너무 힘겨운 삶을 짐 지운 게 아니냐고 묻는다. “바보같이 살았지. 왜 하필이면 내냐? 하필 내한테 불행이 닥쳐오나, 하는 심정이었지. 그런 일이 많이 닥쳐오더라고. 인생살이가. 이게 나의 운명이다 생각했어요. 따지고 보면 종철이만큼 불행한 사람이 어딨겠나? 그것 역시 운명이다. 운명으로 받아들였어요.” 끝으로 ‘트친’(트위터 친구)들이 부탁한 질문 중 하나를 묻는다. “손자들이 철이형처럼 맨날 촛불집회 다니면 나무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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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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