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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3월3일 불교계 민주단체들로 구성된 ‘고 박종철 영가 49재 봉행준비위원회’ 주관으로 49재 행사가 열려 전국에서 모인 승려와 불자들이 서울 조계사로 행진하고 있다. 정부 압력에 밀려 부산 사리암에서 49재를 올리기로 한 총무원과 별도의 행사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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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6
1987년 2월9일.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준비위원회)는 49재날인 3월3일까지를 ‘고문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국민결의기간’으로 선포했다. 2월23일엔 49재에 맞춰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전국에서 연다고 밝혔다. 3월3일, 서울의 평화대행진은 각처에서 출발한 대열이 걸어서 탑골공원에 모이기로 했다. 그러자 정권은 3만여명의 경찰로 탑골공원을 에워싼 채 시민들의 진입을 막았다. 불교계는 앞서 1월20일 박종철과 그의 가족이 불교신자인 점을 들어 49재를 봉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2월18일 조계종은 총무원 종무회의를 통해 49재를 부산의 사리암에서 올린다고 발표했다. 불교계 민주단체들은 이에 반발해 ‘고 박종철 영가 49재 봉행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총무원과 별도로 조계사에서 49재를 진행하기로 했다. 지선·청화 등 스님들이 박종철의 영정을 들고 조계사로 향했다. 조계사 입구도 전투경찰들이 도열해 출입을 막았다. 스님과 신도, 시민들은 근처 도로 위에서 49재 천도재를 약식으로 거행했다. 49재를 마친 스님과 시민들은 행진을 하며 ‘고문추방’·‘독재타도’·‘평화행진’이라고 쓴 풍선을 공중에 날렸다. 이번 평화대행진도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인상적이었다. 시위대가 등장하는 곳마다 박수를 치고 응원의 함성을 보냈다. 49재를 며칠 앞두고, 박정기는 사리암에서 백우 스님을 만났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부산지부의 성재도와 이갑상이 함께한 자리였다. 대불련에는 부산 지역 18개 대학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들은 49재 당일 대각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했다. 3월2일. 아내 정차순과 딸 은숙은 이날도 기관원들의 미행을 따돌리고 부산역에 도착했다. 이번엔 기차를 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서울역에 내려 대합실에 들어서자 형사들이 갑자기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같은 날 맏이 박종부의 회사에도 형사들이 찾아왔다. 이튿날 49재 참여를 막기 위해서였다. 형사들은 가족들 옆에 24시간 붙어 있었다. 저마다 형사들에게 끌려 서울 시내를 돌다 밤늦게 도착한 곳은 종부가 다니는 회사 부장 댁이었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아침 기차에 실려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역에 도착하자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모녀와 종부는 차에 실려 사리암으로 향했다. 사리암 주변에도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입구를 차단했다. 스님들과 일부 신도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부산의 여러 사찰에서 스님들이 몰려들었다.민가협 회원들은 사리암 신도로 위장해 진입에 성공했다. 49재 집행위원장 이갑상도 전날 경찰에 연행되어 동래 온천장의 한 여관에 감금되었지만 탈출에 성공해 행사장에 도착했다. 대불련의 간부 성재도와 한광석은 전날 미리 사리암의 대웅전 불상 밑에 숨어 하룻밤을 지샌 뒤 49재를 준비했다. 사찰 입구에 모인 2300여명의 시민들은 49재가 거행되는 동안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시위를 벌였다. 법당 안엔 300여명이 모여 있었다. 박종철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는 49재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경찰은 백우 스님에게 행사 절차와 시간을 줄여 속히 마무리하라고 요구했지만 스님은 예정한 대로 3시간에 걸쳐 진행했다. 49재를 주관한 통도사의 청하 큰스님은 이날 박종철에게 법명을 주었다. 그가 준 법명은 ‘춘삼’이었다. 춘삼 박종철. 세 개의 봄-민주·평화·통일-을 이루는 자를 뜻하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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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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