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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26 19:54 수정 : 2012.01.26 22:28

1987년 5월18일 오후 6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열린 ‘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경관 3명이 더 있다’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역사의 물길을 바꾼 결정적인 폭로의 한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7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호헌 조처를 발표했다. 현행 헌법에 따라 대통령 선거인단이 체육관에서 뽑는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군사정권 연장 선언이었다.

정부는 “개헌을 문제 삼는 어떤 형태의 사회 불안·혼란 조성, 불법 행위도 법에 따라 엄중 대처한다”고 발표하며 공안 분위기를 조성했다. 대한노인회·한국노총·한국문인협회 등 관변단체들은 일제히 환영을 표시했고, 미당 서정주 시인은 구국의 결단이라며 공개 지지했다.

이른바 ‘4·13 호헌조처’에 따라 이미 85년 2월12일 총선을 거치며 부상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재야의 각 단체들은 즉각 전두환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저항에 나섰다.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4월14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시작으로, 재야 단체들은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민주적 개헌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4월21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각 대학의 교수들과 대학원생들까지 시국선언문을 연이어 발표했다.

3월3일 종철의 49재를 마친 뒤 박정기 내외는 맏이 종부의 결혼식을 서둘렀다. 애초 종부는 대학시절부터 사귄 여자친구 서은석과 지난해 12월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회사 일이 갑자기 바빠지면서 올 2월로 미루었고, 막내가 돌연 세상을 떠나면서 미뤄진 일이었다.

아내 정차순은 “자식 하나 더 잃을 수 없어 결혼시켰다”고 말했고, 종부는 “어머님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 결혼식을 준비했다고 했다. 철이를 보낸 뒤 정차순은 속세를 등지겠다며 삭발하려 했고, 어느날부터 밥을 굶었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았다. 맏이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어머니는 겨우 다시 끼니를 이었다. 딸 은숙과 함께 종부의 신혼집을 구하는 등의 일로 바빠지면서 차츰 상태가 나아졌다.

오랜 기간 사귄데다 예식 준비를 해온 신부의 마음도 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양가는 4월26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듬해 손자를 얻으면서 정차순의 일상은 조금씩 회복되었다. 그는 “손주가 내를 살렸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5월이 돌아왔다. 80년 5월18일 계엄군에 의한 광주시민 학살은 5공화국의 원죄였다. 87년은 광주시민들의 죽음과 박종철의 죽음이 겹친 해였다. 전국의 대학에서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5월18일 오후 6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주최한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시민들과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했다. 곧이어 김승훈 신부가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전날 저녁 함세웅 신부로부터 낭독을 요청받은 성명서였다. 제목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였다.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은 학원분과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반금곤), 경장 이정오(이정호)로서 이들 진범들은 지금도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고문 수사관이 조한경·강진규 외에 세 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정부에 의해 은폐·축소 조작된 사건의 진상이 폭로된 순간이었다.

바로 며칠 전 박종철 고문사 사건을 담당한 황인철 변호사는 박정기에게 말했다.

“범인들이 구치소를 옮겼습니다. 전례 없는 일이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기다려 보면 뭔가 나올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예사롭게 듣고 지나쳤던 박정기는 훗날 사제단의 성명서 발표 소식을 들었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한두 놈이 했겠나? 화난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 우릴 속인 거잖아요. 그건 사람을 두번 죽이는 기야. 그 분노는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 아들이 두번 죽임을 당한 느낌이었어.”

박은숙은 성명서가 발표되기 전날 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철이는 삽을 들고 집 앞마당을 안간힘을 다해 파헤치고 있었다. 누나가 다가가자 동생은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철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아직 멀었어. 더 파야 돼. 땅을 더 파야 된단 말야.”

현실처럼 생생하고 이상한 꿈이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 뒤 정차순에게 말했다.

“엄마, 꿈을 꿨는데 철이가 너무 억울한가봐.”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담은 편지가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기까지 몇 사람의 목숨을 건 용기와 실천이 있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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