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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17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첫 공판을 참관하던 어머니 정차순씨가 피고 경관들의 무죄 항변에 분노하다 실신해 박정기씨에게 업혀 나오고 있다.(왼쪽) 이날 법정 밖에서 민가협 어머니를 비롯한 시민들이 불공정 재판에 대한 항의 시위를 했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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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46
1987년 6월 첫 공판부터 이듬해 7월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고문 경관들에 대한 재판이 열릴 때마다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법부의 권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박정기는 그때 법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회고하며 탄식했다. “닥치는 대로 때려부쉈어. 재판정을 개판으로 만들었지. 정의가 살아있어야 사법부의 권위도 사는 기야. 요즘 영화 <부러진 화살>로 화제가 되고 있는 김명호 교수 석궁사건도 그렇고, 이 정부 들어 사법부 하는 짓도 다 그래. 그때나 지금이나 사법부는 달라진 게 없어.” 방청석엔 언제나 민가협과 유가협의 회원들이 함께했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굴하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사 소식이 알려졌을 때 맨 먼저 임진강으로 달려와 서럽게 모여 울었던 민가협 회원들은 대법원 재판 때까지 박정기와 함께했다. 법정 투쟁으로 구속되고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회원들은 다시 법정에 나타났다. 재판 방청권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나설 때도 있었다. 법원은 교도관과 경찰을 동원해 장막을 쳤고, 반공단체 회원들이 몰려들어 박정기와 민가협 회원들에게 삿대질과 욕설을 내뱉었다. 한번은 박정기가 법대까지 쫓아올라가 재판관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간 적도 있었다. 방청객 중 한 명은 법정 천장에 걸린 전등을 박살내기도 했다. 박정기는 재판정에 들어설 때마다 아들이 법정에서 발언했던 최후진술이 떠오르곤 했다. 그날 울분을 토하던 아들처럼 그도 법정에서 분노했다. 박정기는 훗날 후회했다. 고문 경찰관들에게 고문받았던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가 함께 고발하지 못한 것을. 안기부·보안사·경찰서 등에서 고문받은 이들을 찾아 함께 대응해 더는 이 땅에 고문이 발 디딜 수 없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고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후회를 반복했다. 96년 안기부의 조작 수사에 항의해 김형찬이 분신했을 때도, 97년 나창순이 안기부에서 물고문을 당했을 때도 그랬다. 아들이 물고문으로 희생당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세상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박정기는 형사재판 진행과 더불어 민사소송도 준비했다. 가족과 함께 서울의 어느 유명한 변호사를 찾아갔지만 사건 수임을 고사해 허탈한 심정으로 되돌아왔다. 박정기는 누구에게 사건을 맡겨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중 부산대의 교수 한 분이 김광일 변호사를 소개해줬다. 김광일 변호사를 만난 뒤에야 안도할 수 있었다. 김광일은 그에게 황인철 변호사를 소개해줬다. 황인철 변호사는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그의 노력으로 젊은 변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법정 사상 최대 규모였다. 박종철 사건 변호인단은 조영래·조준희·고영구·박용일·이석태·조용환 등 200여명이었다. 이들은 민변 창설의 주역들이었다. 변론 실무는 이석태 변호사가 맡았다. 88년 4월8일 박정기·정차순을 비롯한 박종철기념사업회 41명의 이름으로 제기된 민사소송은 가족 신원권의 첫 인정 사례였다. 국가 수사기관의 잘못으로 사망한 피해자를 대신해 유가족이 손해배상권을 상속받아 국가를 상대로 청구하는 재판이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이론을 사법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민변의 노력으로 대법원에서 승소를 이끌어내며 여러 해에 걸친 민형사 재판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87년 1월 사건 당시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전모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대책회의 참여자와 회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고, 회의 참석자들에 대한 처벌도 없이 사건은 종료되었다. 고문 경관들에게 제시된 회유자금 2억원의 출처도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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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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