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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7일 서울 조계사에서 불교인권위원회가 처음 제정한 ‘불교인권상’을 받은 박정기(앞줄 가운데)씨가 부인 정차순(앞줄 왼쪽 셋째)씨를 비롯한 가족·지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박씨는 이를 계기로 공권력에 의한 고문 문제와 인권 운동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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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92
1992년 5월7일 박정기는 서울 종로 조계사 문화교육관에서 불교인권상을 받았다. 앞서 4월17일 안동교도소에 수감중인 문익환 후원회장이 ‘4월 혁명상’을 수상한 데 이은 유가협의 경사였다. 환갑이 넘어 인권운동가로 거듭난 그는 불교인권위원회가 만든 이 상의 첫번째 수상자였다. 인권위는 그에게 인권상을 수여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87년 5공화국의 부도덕한 고문에 아들을 빼앗기고도 개인적 차원의 슬픔을 뛰어넘어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5년 남짓 유가협에서도 쉼없는 활동을 보여주었으며,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시작한 91년의 분신정국 속에서도 많은 열사들의 가족과 함께 동고동락을 해왔고,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일깨워주는 자비의 행진을 하고 있어 인권상을 수여한다.” 박정기는 단상에 서서 소감을 말했다. “그동안 인권의 사각지대를 찾아다니며 나름대로 싸워온 것을 평가받아 이런 상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인권의식의 고양을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아들 종철이가 죽은 뒤 조금 개선돼가는 기미가 있던 인권상황이 최근에는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것만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관이나 권력기관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소한 불이익도 인권이 짓밟히는 사례로 파악, 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권의 오지인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박종철기념사업회가 고문과 인권 문제에 전념하도록 애썼다. 박종철의 죽음을 계기로 고문 문제가 전사회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가 인권을 위해 헌신한 또하나의 단체는 ‘문국진과 함께하는 모임’이다. 문국진과 함께하는 모임은 이듬해인 93년 10월13일 향린교회에서 발족식을 열었다. 박정기는 이 모임의 대표였다. 실무는 인재근과 박래군이 맡았다. 문국진은 80년 연세대 철학과 재학 당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이적표현물이라는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다. 86년 10월 그는 노동운동 조직 ‘보임·다산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당했다. 1개월 뒤 정신병세가 악화되어 청량리경찰서에 자수했지만 다시 가해진 고문으로 발작이 생겨 정신병원을 전전했다. 두 차례의 고문으로 그는 정신분열증을 겪고 있었다. 아내 윤연옥이 나서 유가협과 인권단체 등을 찾아다니며 고문 피해자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고 호소했다. “고문은 인간을 파괴시킵니다. 한 인간이 철저하게 파괴돼 가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습니다.” 박정기는 고문 후유증을 여론화하면서 국가를 상대로 한 법정투쟁을 준비했다. 후유증을 겪는 이들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대부분 감추고 있었다. 모임에서는 무엇보다 사법부로 하여금 정신적인 고문후유증을 인정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당시 우리 법원의 판례는 육체적 후유증과 달리 정신적 후유증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한국의 의문사 문제와 인권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다녀온 박래군의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 그가 가져온 자료는 고문피해자의 재활에 관한 내용이었다. 국내에선 고문 문제를 다루는 연구기관이나 조사연구가 전무할 때였지만 외국에선 고문 문제가 폭넓게 연구되고 있었다. 모임은 그동안 문국진을 치료한 신경정신과 의사 배기영에게 ‘고문에 의한 반응성 편집증적 정신병’이라는 소견서를 받았다.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백승헌 변호사가 맡았다. 문국진이 다닌 연세대 동문들이 병원 치료비와 재판 비용, 피해자의 생활비 등을 모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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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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