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6.21 20:01 수정 : 2012.06.21 20:01

1993년 5월25일 북한은 강성산 정무원 총리 명의로 ‘부총리급 특사교환’ 전통문을 보내왔다. 남북 총리회담을 하자는 우리의 제안에 대한 역제안이었다. 사진은 94년 10월 평양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의 단군릉 개축 준공식에 참석한 북한 수뇌부 모습으로, 왼쪽부터 김영남 외교부장, 그 뒤로 황장엽 노동당 비서, 리종옥 부주석, 강성산 총리. <한겨레>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29

1993년 5월20일 김영삼 정부는 ‘남북 총리회담’을 뼈대로 한 대북 제안을 했다. 우리는 곧 호의적 반응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남북대화를 하는 것이 유엔 결의안을 존중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6월 초에 있을 북-미 대화를 실효적으로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북쪽도 우리와 대화하겠다고 나올 게 분명했다. 닷새 뒤 북쪽에서 응답이 왔다. 신속한 대답이긴 했으나 내게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부총리급 대통령 특사를 교환하자고 역제의를 해왔기 때문이다.

북한은 5월25일 강성산 총리 명의의 전통문을 우리쪽 황인성 총리에게 전달했다. 김 대통령의 취임사 정신을 반영한 전향적인 내용이었다. 강 총리는 이 전통문에서 “남쪽에서도 새 정권의 출범과 함께 과거와는 달리 민족의 이익을 중시하는 입장을 표명하고…”라고 밝히면서 대통령 취임사에 대한 호의적 대응임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의 10대 강령도 그 뜻을 존중한다고 했다. 남북이 민족 이익을 중시하는 일에 뜻이 같다며 70년대 이후 남북 당국자 간의 대화가 실패했지만 이제는 남북이 함께 민족의 앞날을 열어나갈 기회가 왔다고 했다.

“이런 때에 즈음하여 나는 민족 앞에 누적되어 있는 중대사들을 포괄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획기적인 제안으로서 쌍방 최고 당국자들이 임명하는 특사들을 교환할 것을 정중히 제의하는 바입니다. 특사들은 나라의 통일문제 해결을 위하여 쌍방 정상들이 만나는 문제와 북남 사이의 현안을 타결하기 위한 최고위급의 중대한 뜻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사들은 부여된 임무를 고려하여 각기 통일사업을 전담하여 보는 부총리급으로 하며 그들의 교환 시기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북한 당국은 특사교환이야말로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새롭게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나아가 민족화합과 통일에 실질적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권위있고 책임있는 부총리급 특사교환이 이뤄지면 우리가 제기한 총리급 회담에서 협의하려는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특사교환을 위해 5월31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차관급 접촉을 하자고 했다.

이즈음에서 특사교환 제의에 나타난 몇 가지 흥미로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핵문제를 위시한 큰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풀어가자는 북한 당국의 의지가 엿보였다. 정상회담을 포함해서 민족 당사자 간의 회담에서 모든 주요 당면문제를 포괄적 획기적으로 풀어가자고 했다. 이는 김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또 미국에 요구해온 포괄적 대화를 남쪽과도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은 의미있는 변화였다. 여기서 포괄적이라 함은 일괄타결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둘째로 이미 전임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이 합의한 것을 새롭게 실천해 나가자는 의지가 엿보였다. 남북이 직접 대화를 하자는 뜻이니 긍정적인 메시지였다. 셋째로 총리 대신 부총리급이 만나자는 것은 각기 최고위급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실세 간의 회담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혔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북한 당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남쪽 부총리의 입지를 크게 좁혀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여하튼 이 전통문을 통해 평양은 황인성 총리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것은 핵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려는 정부 안팎의 보수세력을 한층 격분시키고 단결시키는 결과를 낳을 게 뻔했다. 그러니 부총리급 특사교환 제의는 그들에게 탈냉전 대북정책(또는 햇볕정책)을 더 혹독하게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꼴이기도 했다. 그만큼 내 운신의 폭은 한층 더 좁아졌다.

‘평양에는 전술적 사고만 할 뿐 큰 틀에서 전략적 사고를 하는 인물은 없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나와 통일원이 중심에 서서 남북대화의 물꼬를 열어나가려면 북쪽에서 나를 특사로 지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의 이런 곤혹스러움을 읽고 있던 정부 안팎의 ‘냉전 전사’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5월25일 북한의 제의는 내겐 일종의 ‘죽음의 키스’였다.

한완상 전 부총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