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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1월12일 김덕(가운데) 안기부장이 국회 국방위원회 간담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에 ‘북핵 일괄타결 가능성이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때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은 미국 쪽에 ‘대북 강경대응’을 압박할 전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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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53
1993년 11월12일 나는 외무통일위원회에서 94년도 통일원의 예산안 제안 설명을 했다. 그런데 의원들은 정작 예산안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북핵 문제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결국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북-미 회담의 북한 대표인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이 전날 발표한 ‘일괄타결 제안’의 담화 전문을 공개했다. 이를 놓고 여야 의원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내가 정부 입장을 밝히려 했으나 그럴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마침 이날 김덕 안기부장도 국방위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일괄타결의 합리성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 발언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그 다음날에는 내가 김 부장과 함께 미국의 일괄타결책을 우리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했다는 보도가 크게 실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기사를 보고 화를 냈고 결국 다음날 아침 외무부를 통해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은 일괄타결이 아니라 선사찰 후타결’이라고 밝히게 했다. 그러자 새 정부 안에 통일·외교·안보 부서 사이에 균열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사실 이때 미국 정부는 새로운 대북정책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었다. 외교안보담당 차관급 회의에서 북한과 포괄적 접근책을 논의했다. 10월 초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이 주재한 통일안보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이 미국에도 알려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일괄타결을 논할 때가 되었다고 했으나, 한승주 외무부 장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당국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그도 새로운 대북 접근책으로서 포괄적 타결책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은 우리 내부에서 생겨난 이런 새로운 흐름을 알게 되면서 차관급 회의에서 핵 문제부터 북-미 관계 개선까지 대북 포괄책을 정식으로 논의했던 것이다. 애커먼 의원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와서 북한도 포괄적 접근을 선호한다고 알린 것도 새로운 대북정책에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은 차관급 회의에서는 포괄적 접근책을 상부에 건의한 데 이어 11월15일 열린 외교안보 장관급 회의에서 포괄적 접근법을 승인했다. 토니 레이크 국가안보 보좌관,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레스 애스핀 국방장관, 존 샬리카슈빌리 합참의장, 제임스 울시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이 참석했다. 한마디로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일괄타결 같은 포괄적 대북정책을 활용하기로 뜻을 굳힌 셈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에서는 여전히 미국의 이런 흐름과 사뭇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미국의 포괄적 대응방안에 대해 정부는 북한에 지나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더 가혹한 채찍을 들어야 하는데 당근을 들고 있다고 판단했다. 국내 보수·냉전 언론을 너무 의식한 탓이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런 판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클린턴 행정부가 북핵 문제 포괄적 접근안을 승인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긴장했다. 당시 김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할 준비를 하느라 예민한 상태였다. 김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은 미국의 새로운 대북 접근책이 한국 정부의 안보정책을 무시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분노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 대통령 특유의 뒤집기로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고 결심한 듯했다. 여기에는 당연히 비서실장과 안보수석의 입김이 작용했다. 한승주 외무장관은 이런 흐름 속에서도 미국 당국자들과 협의하면서 정상회담 때 두 나라 대통령이 서명할 새로운 포괄정책안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한 외무와 미국 정부는 청와대의 뒤집기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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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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