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1월6일 통일원을 예방한 레이니 대사와 필자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고 있다. 70년 초부터 오랜 지기인 두 사람은 전날 ‘부임 환영연’에서 함께하지 못한 섭섭함을 웃음으로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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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59)
1993년 11월6일 오전 9시30분 레이니 주한 미대사가 통일원 집무실로 예방했다. 먼저 전날 환영연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양해해달라고 하고 한 시간쯤 담소를 나눴다. 혹시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싶어 몇가지 대외용 공통 관심사를 강조해 언급했다. 첫째, 북핵문제 해결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 유지에 중요하다. 4일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를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둘째, 문민정부의 단계적 통일 방안은 정당하고 적합하다. 셋째, 한·미 양국은 북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인내심이 소진되고 있지만, 모든 선택지를 활용하여 북의 핵투명성을 밝혀내야 한다. 넷째,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높이 평가한다. 마지막 넷째는 내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증거이니 너무 당연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역대 주한 미대사와 레이니의 차이를 부각시키고자 새삼 확인한 것이었다. 다음날 조간신문에는 레이니 대사와 내가 악수를 하거나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진이 실렸다. <한겨레>는 이렇게 보도했다. “레이니 대사는 한 부총리를 만나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5일 저녁 자신을 위한 환영만찬에 참석하지 않은 데 대해 우리말로 ‘섭섭하다’고 해 두 사람의 친분을 과시했다.” <조선일보>도 우리가 악수하는 사진을 실었는데 레이니가 미국 에모리대학 시절 나의 스승이라고 소개했다. 오보였다. 내가 에모리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 레이니는 예일대 신학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학위를 받은 뒤 레이니는 밴더빌트대학 신학부 교수로 부임했고, 나는 테네시공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뒤 레이니는 에모리대학 신학대학장을 맡았다. 11월3~4일 서울에서 열린 제25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에는 뉴욕에서 북한의 허종 유엔 차석대사와 긴밀하게 접촉해온 토머스 허버드 국무부 부차관보가 참석했다. 그는 11월4일 나를 예방했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허버드가 허종 대사와 자주 만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조선일보>(10월22일치)는 허버드가 강대국 관리답지 않게 행동한다고 내놓고 비난했다. 북한의 전략에 미국이 끌려 다닌다는 힐난이었다. 나는 한국 보수언론의 이런 비난에 미국이 영향을 받을까봐 염려스러웠다. 허버드도 서울에 머무는 동안 냉전 강경세력의 영향을 받았는지 북한이 3차 남북 실무접촉을 무산시킨 것은 미리 짜놓은 계략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11월1일 유엔 총회에서 대북 결의안이 140 대 1로 통과되는 것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데다, 남쪽 국방부 장관의 다소 심한 발언에 자극을 받아 실무회담을 무산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허버드에게 한 가지를 강조했다. 북-미 대화가 실패한다면 미국은 정책 하나를 실패한 것에 불과하지만, 북한은 체제 전체를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라고 했다. 북한을 상대할 때는 시장논리의 합리성이나 예측성을 전제하지 말라고 했다. 레이니에게 들으니 허버드가 청와대를 예방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일을 잘했다고 두번씩이나 칭찬했단다. 이즈음 미국은 북한에 채찍을 쓰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채찍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외교적 노력이 소진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고심하는 듯했다. 한국의 냉전 강경세력은 이런 클린턴 정부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실적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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