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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8.06 19:43 수정 : 2012.08.06 19:43

1993년 12월21일 단행된 개각에서 필자는 10개월 만에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에서 물러났다. 교체 통보를 받은 필자가 집무실에서 직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이튿날 <동아일보> 등 조간신문에 나올 정도로 문민정부의 개혁성을 상징했던 그의 퇴진은 적잖은 파문을 던졌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61

1993년 12월17일 나는 유력 종합일간지 정치부장들을 오찬에 초청했다. 초대에 응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조선일보> 강아무개 부장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공부한 내 제자였다. 그 무렵 <조선일보>와 나는 퍽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오지 않은 것을 알고 퍽 씁쓸했다. 이런 때일수록 사제관계는 아름답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더 섭섭했다. 그런데 그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니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자기가 그 자리에 참석하면 좋은 분위기가 깨질까 염려하여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역지사지가 주는 성찰의 기쁨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내 제자나 후배 중 세계관이나 인생관, 역사의식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멀리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다. 다만 너무 과격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독선과 교만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고,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냉전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부패하지 않기를, 좀더 열린 사고를 갖기를 바랐다.

12월21일 각오의 시간이 다가왔다. 대폭 개각을 앞둔 태풍전야 같은 아침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맏사위 이창해씨의 전갈이 있어서 대강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문제로 김 대통령이 고심하는 듯했다. 사실 대통령 주변에 이미 ‘철저하고 광범위한 대북정책’을 강행하려는 흐름이 강하게 흘러서 나 자신 이미 떠날 때가 되었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당선자 시절 나를 불러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면서 “한 박사와 5년 내내 개혁을 확실히 추진해야지”라고 격려하던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나는 지난 10개월 동안 남북관계에서 과감히 개혁을 추진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그동안 남북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취임하자마자 ‘이인모 노인 북송’이라는 과감한 개혁조처와 결단을 내렸음에도 남북관계는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더 크게 보면 북핵문제가 나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북한의 돌연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이 남쪽의 냉전강경세력으로 하여금 내 행보를 더 완강하게 막게 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남북간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한층 악화된 상황에서 떠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오전 10시쯤 통일원 집무실에 앉아 있는데 김덕 안기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대뜸 “일기가 좋다”고 했다. 나의 유임이 낙관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일기가 좋기는커녕 비바람이 부는 것도 같고 구름도 끼어 우중충한데….” 김 부장은 대통령의 사돈 쪽과 가까워서 그쪽에서 얘기를 들은 듯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박관용 비서실장과 손을 잡고 대북정책을 ‘철저한’ 접근 쪽으로 끌고 가려 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위로와 격려의 전화를 해준 김 부장이 고마웠다.

오전 11시쯤 마침내 박 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통령이 나에게는 미리 알려주라고 했다면서 ‘오늘 오후에 대폭 개각이 있고 거기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했다. 총리 이하 14개 부처 책임자들이 개각 대상이라고 했다. 미리 알려주는 ‘따뜻한’ 배려의 전화를 받고 나는 ‘알겠다’고, ‘고맙다’고 얘기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통일부총리로 일한 지난 10개월 동안 나는 북한을 상대하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남쪽의 냉전강경 정치인들과 수구언론을 상대로 한 신경전 때문에 더 지쳤다. 대통령 취임사의 빛이 날로 사그라지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웠는데,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남북관계가 염려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제야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기기도 했다. 여하튼 통일부총리 시절은 괴롭고 외로운 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10개월이 마치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동안 ‘부총리 집무실’이라는 ‘거창한 정치 감방’에 자유롭게 갇혀 있다가 풀려난 것 같은 역설적인 기쁨이랄까, 홀가분한 해방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정말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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