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08 19:49
수정 : 2012.08.0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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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21일 통일부총리에서 물러난 필자는 연말연시 동안 미국 여행길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30여년 전 가난한 유학생으로 미국 땅에 첫발을 디뎠던 회상에 젖었다. 사진은 62년 가을 에모리대 대학원 첫 학기 때 기숙사에서 자취할 때 요리를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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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64)
1993년 크리스마스를 오랜만에 조용히 보냈다. 평화의 땅으로 오신 아기예수는 태어나자 곧 폭력의 왕 헤롯의 살육행위를 피해 피난을 가야 했다. 평화를 세우기 위해 태어난 모든 존재는 운명적으로 폭력의 권력에 의해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폭력과 독선의 체제와 구조가 결코 평화를 영원히 지우지 못한다는 것이 크리스마스가 주는 의미가 아닐까. 평화는 이 구체적인 역사 현실 속에서는 권력의 폭력에 의해 짓밟히고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지만, 그러한 고난 속에서 평화의 씨앗은 계속 뿌려지며, 그 씨앗들은 고통이라는 토양을 딛고 내일을 향해 끈질기게 자라는 것 아닌가. ‘평화의 왕’ 예수가 서른 중턱에 로마의 실정법에 의해 극형을 당했지만, 평화는 부활한 것 아닌가. 팍스 로마나는 결국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예수의 평화는 오늘도 씨앗으로, 생명나무로 조용히 그러나 착실히 자라는 것 아닌가. 당장 내 속에서도 자라고 있지 않는가. 지난주에 나는 통일 부총리의 자리를 떠났지만, 조국통일과 평화의 뜻은 내 마음속에 더욱 깊이 씨앗처럼 뿌리내리고 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다. 지난 10개월간의 시달림이 이 씨앗의 옥토가 되고 있는 듯하다.
12월27일 아내와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 비행장에 내리니 몇 가지 뚜렷한 영상이 가슴 시리게 떠올랐다.
맨 먼저 62년 9월 초의 내 초라한 모습과 한인감리교교회 송정율 목사님께 저질렀던 심야의 무례가 생각났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는 돈이 없어 서울에서 종착지인 애틀랜타까지 가는 비행기표를 살 수 없어 샌프란시스코까지만 표를 끊었다. 거기서부터는 미 대륙을 관통하는 버스표를 샀다. 그것도 중간중간 쉬어갈 형편이 아니어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계속 갈아타며 차 안에서 먹고 자며 가야 했다. 그렇게 70시간을 넘게 달려 에모리대학이 있는 애틀랜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샌프란시스코공항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 3시, 달리 아는 이가 없어 송 목사님께 전화를 했던 것이다. 한국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셨던 홍현설 박사님이 친구인 그분에게 책 심부름을 보냈다는 명분이었다. 송 목사님은 일찍이 에모리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노스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의 구심 노릇을 한 분이었다. 낯선 젊은이를 맞아 말없이 비행장까지 직접 차를 몰고 와 주신 목사님 댁에서 나는 사흘이나 신세를 졌다. 미안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지금도 남아 있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또 하나의 기억은 꼭 11년 전인 82년 가을의 일화다. 이때 나는 망명객으로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민주화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교외에 있는 한인교회에서도 여러 차례 강연을 했다. 어느 날 오전 강연 도중에 한 젊은이가 급히 자리를 떴다. 10분쯤 지나 그 젊은이는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얼굴을 보니 울고 온 것 같았다. 강연이 끝나자 그 젊은이가 내게 찾아왔다. 그가 급히 나가서 실컷 울고 온 사연은 이랬다.
그날 강연에서 나는 80년 가을 육군본부 군법회의장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20여명의 공동피고인들이 최후진술을 하는 긴장된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 서울한빛교회에서 시무했던 이해동 목사님의 증언이 온 법정을 울렸다. 그는 교도소 관례에 따라 세탁물을 가족에게 내보냈지만, 아직도 아내에게 보내지 못하고 있는 세탁물 하나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남산 지하실에서 고문당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속옷이었다. 아내가 충격을 받을까봐 그랬던 것이다. 그러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가족들 모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피고인들도 소리를 꾹꾹 눌러가며 뜨겁게 속으로 울었다. 그 젊은이는 바로 그 대목에서 끓어오르는 서러운 아픔을 견딜 수 없어 뛰쳐나갔다면서 자신도 서울에서 한빛교회에 다녔다고 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며칠 묵으며 그때 나를 초청해줬던 한인교회의 목사님을 비롯해 망명생활 때 만났던 친구와 지인들을 만나 즐겁게 지난날을 회고했다. 나는 감사했다. 그들은 조국의 평화와 민주화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한반도의 핵 문제를 걱정했다.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한-미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염려했다. 문민정부가 보수적으로 변질되는 것도 걱정했다.
나는 이번 미국 여행에서 예수의 평화운동과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깊이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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