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8.09 19:49 수정 : 2012.08.09 19:49

1994년 1월 초 미국 여행에 나선 필자 부부는 시카고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던 둘째 사위와 셋째딸 주리씨를 만나 모처럼 가족의 정을 나눴다. 사진은 2009년 11월 애틀랜타의 에모리대에서 필자의 ‘명예로운 해외 동창상’ 수상 때 모습으로, 왼쪽부터 둘째딸 리사, 맏딸 미미씨, 레이니 전 주한 미대사, 필자, 부인 김형(서울YWCA 전 회장), 막내딸 주리씨, 버타 레이니.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65)

1994년 1월의 첫 주일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 그날 나는 예수께서 본격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시기 전 광야로 나가 운동의 목적과 본질을 깊이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 새삼 주목했다.

청년 예수는 자기 온 존재, 온 삶을 던져 이룩해야 할 새 운동의 가치를 온전하게 깨닫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쳤다. 40일 밤낮을 굶으며 이 운동의 의미를 깨닫고자 했다. 여기서 예수 운동을 달콤하게 좌절시키려 했던 악마의 꾐이 갖는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악마는 힘의 논리, 힘의 가치, 힘의 비전으로 예수 운동을 좌절시키려 했다. 무슨 힘이었던가? 그 힘이 오늘 우리 한반도의 참된 평화를 세우는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기독교 신자로서 국가의 주요 임무를 맡은 분들은 예수께서 그때 어떻게 광야의 유혹을 물리쳤는지를 올곧게 깨달아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경제력·군사력·과학기술력 모두 필요하지만, 그것들만으로는 평화를 올곧게 세울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예수교장로회의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께서 세속적 힘만으로 북한을 옥죄는 것이 결코 참된 평화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깨닫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번 미국 여행 동안 교회에서 증언을 한다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뒤 시카고에서 우리 부부는 복음주의적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둘째 사위와 막내딸을 만났다. 둘째 사위는 공대를 나와 미국의 큰 비행기회사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미국의 명문 여대인 브린모어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기독교육학 분야의 석사학위를 받은 둘째딸의 권유를 즐거이 받아들인 것이다.

막내딸은 레이니 주한 미대사가 에모리대학 총장 시절 친딸처럼 여러가지로 돌봐주었다. 덕분에 4년 내내 장학금까지 받았던 막내는 졸업한 뒤 둘째 사위와 같은 신학대학에서 카운슬링심리학 공부를 하고 있었다.

딸만 셋인 우리 아이들은 모두 ‘꿈쟁이’로 자랐다. 세속적 가치보다는 ‘예수 따르미’가 되고자 했다. 학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둘째딸도,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한 막내딸도 모두 대학원에서는 신학 공부를 했다. 배고픈 길로 뛰어든 것이다. 아버지로서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을 자랑스러워했다.

모처럼 딸과 사위 그리고 갓 태어난 손녀까지 만나 참으로 기쁜 시간을 보냈다. 삭막했던 지난 1년간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가슴 찡한 사랑이었다. 나는 이들이 돈·명예·권력 같은 세상 가치들에 때묻지 않고 천사처럼 살면서 가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여유, 그 참여유를 알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어 시카고를 떠나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뉴욕으로 갔다. 꼭 10년 전, 그러니까 84년, 3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곳이다. 애틀랜타에서 1년을 지낸 뒤 뉴욕에서 보낸 2년 동안 목요기도회를 이끌었던 민주동지들은 이제 사방으로 흩어진 듯했다. 80년대 초 그 긴박했던 순간들, 포트리에 있는 다이너 식당에서 자주 모여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가슴을 열어놓고 뜨겁게 토론하고, 논의하고, 합의하고 다짐했던 우리들의 대견한 모습들이 어제인 듯 선연했다. 이승만 목사 부부, 임순만 목사, 장혜원 박사, 안중식 목사, 김정순 교장 부부, 김홍준 선생 부부 등이 모두 그리웠다.

1월9일 일요일에는 망명객인 우리 가족에게 피난처였던 브루클린 한인교회에서 말씀 증거를 했다. 아내가 전도사로 온몸과 온 정성으로 교우들과 소통하고 섬겼던 교회였기에 감회가 더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이튿날 밤 뉴욕을 떠나 서울에 오니 12일 아침이었다. 사실 70년대만 하더라도 외국 나가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나처럼 재야 민주화 세력으로 찍힌 사람은 정치적 이유로 더 어려웠다. 어쩌다 어렵사리 외유를 하고 돌아올 때면 정치적 자유가 없는, 곧 캄캄한 굴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귀국의 맛은 달콤했다. ‘역시 집이 최고야’라는 느낌이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내 개인 집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큰 집이 그렇다는 뜻이다. 자유가 고향의 맛을 더욱 몸으로 느끼게 하는구나!

한완상 전 부총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길을 찾아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