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25일 김영삼 대통령과 부인 손명순(왼쪽)씨가 서울 역삼동 충현교회에서 성탄예배에 참석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조용한 내조를 했던 손씨는 94년 초 청와대로 인사 전화를 한 필자에게 김 대통령을 대신해 ‘통일부총리 경질’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해주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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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66
1994년 1월17일 저녁 7시 서울 인사동에 있는 한식당 목연에서 지난 대통령선거 때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도왔던 ‘신한국팀’이 모였다. 박관용 실장, 김정남 수석, 차동세 박사, 이명현 교수 등이 모였다. 지난해 이맘때만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새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다소 흥분해 있었다. 문민정부다운 새로운 모습을 국민과 역사 앞에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우리가 지녔던 자신에 찬 열정은 사라져버린 듯 모임은 내내 우울하고 불편했다. 마침 교육개혁위원회 설치 문제가 화제가 되었는데, 거론되는 위원들 모두가 비상임인데다 예산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는 것 같아 위원회의 앞날이 험난할 듯했다. 전문위원들도 개혁적인 것 같지 않았다. 다만 12·12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한 것은 올곧은 일이요 용기 있는 일이었음에 이견에 없었다. 하지만 12·12사태의 정당성을 미국에 가서 설명하고 설득했던 당시 육군 대령을 문민정부의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한 것은 자가당착이요, 철학 부재에서 빚어진 것임을 지적했다. 그 자리는 그렇게 썰렁하게 모여 썰렁하게 헤어졌다. 앞으로 더욱 염려스러운 일은 김 대통령이 변화시켜야 할 여론과 존중해야 할 여론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할 때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마치 2천년 전,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 청년 예수의 무죄를 알면서도 그를 죽이라는 들끓는 여론에 밀려 결국 예수를 십자가 극형에 처했던 것과 같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사도신경’의 기록을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억명의 크리스천들이 일요일마다 읊조리며 기억하고 있다. 일종의 종교적 저주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 며칠 뒤 아내가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정이 유달리 많은 분이었다. 그러면 직접 전화해서 말씀드려보라고 했더니, 아내는 어려워서 직접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청와대 부속실을 통해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손 여사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해서 깜짝 놀랐다. “… 한 박사님을 그렇게 내보내는 게 아닌데. 쥐구멍에 팍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요”라고 답을 했는데도 여사는 연거푸 세 번씩이나 사과를 했다. 나는 당황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사실 지난달 개각하기 전, 김 대통령이 내게 직접 전화를 해서 ‘이번 개각에는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되었지만 신한국 창조를 위해서 정부 밖에서 더 도와달라’고 솔직하게 얘기했다면 조금은 덜 섭섭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손 여사의 인간적인 위로의 말씀, 그 직설적이면서도 정이 넘치는 ‘쥐구멍’ 얘기에 내 속에 쌓였던 감정적 응어리가 한꺼번에 녹아 없어진 듯했다. 손 여사의 인간미 넘치는 직설이 김 대통령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뜨거운 힘이란 사실을 실감했다. 전화를 끊고 뒤에도 한참 동안 그 목소리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래서일까, 1월22일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조찬을 함께 하자고 하는 연락이 왔다. 국무위원 자격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으로, 지식인으로 청와대로 갔다. 오전 7시20분쯤 김 대통령이 밝은 표정으로 들어와 그다운 소박하고 소탈한 목소리로 식탁에 앉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아, 그 우루과이 라운드 문제만 아니면, 한 박사 나갈 필요가 없었는데, 고마 우루과이 라운드 문제에 걸려 이렇게 되었소, 아 참….”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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