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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초순 필자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취임식을 전후해 아프리카 네 나라를 순방했다. 사진은 당시 필자의 방문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한 이집트의 영어신문 <이집션 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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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0)
1994년 4월20일, 한승주 외무장관이 전화로 김영삼 대통령의 뜻이라며 뜻밖의 제의를 전했다. 한 외무는 며칠 전 내게 중남미의 어느 작은 나라 대통령 취임식에 대통령 특사로 다녀올 의향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전화를 받으며 중남미 쪽으로 가게 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나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보내라고 명했단다. ‘남아공’ 대통령은 누구인가. 평소 그의 민주화 투쟁, 인종차별제도에 대한 저항으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양심수 넬슨 만델라가 이제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세계적 민주투사요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만델라 대통령 취임식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알고 있기에 나를 특사로 보내라고 한 것 같았다. 정말 불감청이나 고소원이었다. 대통령이 아직도 민주화의 열정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동행하면서 도와줄 외무부 중동심의관 배상길 국장이 찾아왔다. 그는 만델라 대통령 취임식인 5월10일을 전후해 아프리카 4개 나라를 순방하며 한반도 평화와 핵문제를 국가 수반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일러주었다. 프랑스어에 능통한 성실한 배 심의관이 동행한다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한편으로는 탄자니아 므위니 대통령, 케냐의 모이 대통령도 예방해야 하고, 만델라 취임식에 참석하는 아프리카 지도자들 중에 누군가를 특별히 만나라는 긴급훈령이 내려올지도 모르기에 긴장하기도 했다. 하기야 이런 긴장은 얼마든지 즐길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4월29일 나는 배 심의관과 함께 대한항공(KAL 915편)으로 로마를 향했다. 아프리카까지 직항편이 없던 시절이었다. 밤 9시40분 로마에 도착하니 이기주 주이탈리아 대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 대사는 서울대 문리대 동창이기도 하다. 이튿날 아침 이 대사가 찾아와 서울에서 새 훈령이 막 도착했다고 일러주었다. 남아공으로 가는 길에 이집트 카이로에 들르라는 내용이었다. 5월4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역사적인 중동평화협정 조인식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고,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만나 북핵 문제와 함께 현재의 영사관계를 대사관계 수준으로 격상하는 문제도 논의하라는 훈령이었다. 나는 이집트 당국을 설득하기가 녹록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지난 67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때 북한이 공군 조종사를 보내 지원해준 까닭에 두 나라는 혈맹의 친밀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당시 공군 총참모장이었던 무바라크 대통령은 북한을 특별한 우방국으로 예우해왔다. 이집트 정부로서는 북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월1일 저녁 7시에 카이로로 향하는 이집트 항공기 안에서 그 지역의 유일한 영어신문을 펼쳐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1면에 한국 특사가 평화협정 조인식 참석차 카이로로 오고 있다는 기사가 크게 실린 것이다. 나는 우리의 비중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밤 11시 카이로공항에 도착하니 늦은 시간인데도 이집트 외무차관보와 우리 총영사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숙소인 르메리디앵호텔로 가는 나일강변의 고가도로 양쪽에는 한국 대기업의 커다란 광고판들이 환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한국 가전제품들, 특히 텔레비전 시장에서 우리의 엘지(LG) 제품이 무려 70% 이상을 차지한다는 얘기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내가 믿기 힘들다고 하니까, 외무차관보는 조찬 일정이 잡혀 있는 재무장관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일러주었다. 아름다운 나일강변의 르메리디앵호텔에 들어가니, 방 안에 화사한 화분 두 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나는 김덕 안기부장이 보냈고, 다른 하나에는 삼성의 김헌출 사장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 사장은 동생처럼 아끼는 대학 후배다. 내 방 앞에서는 이집트 정부의 안전요원이 밤샘근무를 했다. 미안했다. 그만큼 이곳의 안전문제가 심각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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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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