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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3일 필자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을 공식 면담하고 ‘한-이집트 수교’를 제의했다. 95년 4월 두 나라는 영사급에서 대사급으로 격상된 외교관계를 맺었다. 사진은 카이로의 대통령궁에서 함께한 필자, 무바라크, 정태익 주카이로 총영사의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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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1
1994년 5월2일 오전에는 카이로 시내를 구경했는데, 놀랍고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현대차 엑셀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선도했다. 저녁 7시30분, 무사 외무장관을 만나 45분간 두 나라 간의 여러 현안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나는 먼저 이번 역사적 평화협정 조인식에 초청해주어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두 나라의 경제협력과 함께 우리나라가 유엔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으로 진출하는 데 협조를 당부했다. 그다음으로 나는 한반도 비핵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소해야 할 문제임을 역설하면서 이집트 정부의 탁월한 외교력이 요청된다고 했다. 그런 차원에서 두 나라의 외교관계를 한 단계 높이는 문제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러나 정중하게 우리 정부의 입장을 피력했다. 예상대로 무사 외무장관은 잔잔히 웃으면서 적당하게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 자리에 배석했던 정태익 총영사는 나보다 훨씬 애가 타는 눈치였다. 그는 아직 대사가 아니어서 무바라크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장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의 방문을 계기로 외교관계 격상이 이뤄지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5월3일, 역사적인 협정의 서명이 이뤄질 내일 평화잔치를 준비하느라고 카이로는 온통 법석이었다. 이날 오후 늦은 시간에 무바라크 대통령을 예방하기로 일정이 잡혔다. 오후가 돼서야 확정된 것이다. 정 대사와 배 심의관을 포함해 모두 4명인 우리 일행은 오후 5시20분께 대통령궁에 도착했다. 궁에는 이미 주요 국가의 귀빈들로 꽉 차있었다.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 코지레프 러시아 외무, 일본의 가키자와 외상 등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오후 6시가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 의아해하고 있는데, 복도에서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평화서명의 주역인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장관이 도착했단다. 이들이 새치기를 한 셈이었다. 한 시간쯤 더 기다렸더니, 드디어 대통령 비서실장이 우리를 안내했다. 건장한 체격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우리가 자리에 앉자 먼저 정중하게 사과부터 했다. 한순간 강퍅해졌던 내 마음은 그의 사과로 눈 녹듯 풀어졌다. 그는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고 우리 대통령 친서를 음미하듯 숙독했다. ‘과연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한 그는 ‘핵무기가 없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을 존중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늘의 북핵 문제는 북한이 과연 핵무기를 얼마나 제조했느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핵 의혹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몇주 전 방문한 중국에서 장쩌민 주석과 북핵 문제를 논의했다고 하면서, 남북간 문제의 핵심은 상호 신뢰의 부재라고 지적했다. 신뢰 회복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경제협력이라고 강조했다.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해주는 그의 태도에 나는 용기를 내어 두 나라의 30년 넘은 영사관계를 이제는 대사관계로 격상할 때가 되었다고 말을 꺼냈다. 부쩍 늘어난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한국 대사가 이집트에서 활동할 때가 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무바라크는 짐작한대로 이집트와 북한의 특수관계를 솔직하게 언급했다. 그는 대사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면서도 딱 부러진 날짜는 물론 밝히지 않았다. 그는 북한과의 의리를 지키면서 남한과는 상호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중의중리(重義重利)의 정책을 선호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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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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