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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4일 필자는 김영삼 대통령의 특사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의 역사적인 중동평화협정 조인식에 참석했다. 사진 왼쪽부터 무사 이집트 외무,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 코지레프 러시아 외무, 라빈 이스라엘 총리,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팔레스타인 외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의장,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장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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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2
1994년 5월4일 청명한 봄날이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천년간 대결과 반목, 긴장과 충돌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PLO) 민족 사이에 마침내 평화협정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하늘도 이날을 축복하듯 맑고 따뜻했다. 지금은 동화처럼 들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구약에서 블레셋)의 대결이었다. 오전 11시 조금 지나 카이로의 그 넓은 국제회의장은 세계 각지에서 온 증인들로 가득 찼다. 한국 특사에게는 한가운데 맨 앞줄, 그러니까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일본 외상은 오른쪽 끝에 앉아 있었다. 무대 위에는 무바라크 대통령을 중심으로 그의 왼편에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의장, 크리스토퍼 미국 국무장관, 그리고 팔레스타인 외무장관 순으로 섰다. 무바라크의 오른쪽에는 라빈 이스라엘 총리, 코지레프 러시아 외무장관,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 무사 이집트 외무장관 순이었다. 평화협정 잔치의 중재자인 무바라크 대통령이 연설을 마친 뒤 곧 서명에 들어갔다. 아라파트 의장은 볼품없는 볼펜으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여러 문건에 서명했다. 홀을 가득 채운 2500여명의 증인들은 그 서명을 환영하고 추인하는 듯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뒤이어 라빈 총리가 몽블랑처럼 보이는 고급 만년필로 서명했다. 그런데 잠시 뒤 그는 일어나더니 급히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갑자기 단상 위에서는 불길한 술렁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듯했다. 아라파트가 지도 경계선에 관련된 문건에 서명하지 않았음을 발견한 라빈이 이를 문제삼았던 것이다.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얼굴이 벌게지고 있는 라빈 총리, 지도에 대한 불만으로 입이 불쑥 나온 아라파트 의장, 그 사이를 급하게 왔다 갔다 하는 평화 중재자들 모습을 지켜보며 내 마음도 조마조마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잠시 정회를 선언했다. 10분쯤 지나자, 다시 서명 당사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무대 위로 다시 등장할 때 평화 참관 증인들은 또 한번 뜨겁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침내 아라파트가 다시 서명을 하기 위해 책상으로 걸어갈 때 증인들의 박수는 더욱 뜨거웠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힘찬 응원의 박수였다. 소동 끝에 서명이 끝난 뒤 오늘의 주역들이 연설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이미 점령했던 땅을 팔레스타인의 자치령으로 넘겨주기로 약속한 이스라엘 대표들이 먼저 연설을 했다. 나는 진한 감명을 받았다. 페레스 장관의 연설은 단문이기에 한층 힘이 있었다. “마치 미래가 불가피하게 오듯, 평화도 불가피합니다. 1년 전만 해도 오늘의 이런 모임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오늘 그것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는 과학자들의 캠퍼스에 있는 것이지, 군인들의 캠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빈 총리는 평화를 다음 세대와 연관시켜 이렇게 울부짖듯 강조했다. “조상의 땅을 위해 우리가 싸워온 전쟁은 우리의 자녀들이 갖고 있는 최선의 것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적·정신적 힘을 모두 소진시켰습니다. 전쟁은 우리의 생명력과 존재를 우리 스스로 선택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 길은 우리에게 슬픔만 안겨다준 고뇌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사별이 다른 집안 어머니들의 슬픔과 다를 바 없고, 그들의 눈물도 우리 어머니들의 눈물과 다를 바 없이 짜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가슴 찢어지는 고통의 외침은 어떤 언어로 표현되든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이 고통과 죽음의 고리를 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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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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