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22 19:48
수정 : 2012.08.23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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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10일 필자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해 역사적인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사진은 그해 4월27일 총선에서 만델라(오른쪽)와 백인정권의 마지막 통치자 데클레르크 전 대통령(왼쪽)이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승리를 확정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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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74)
1994년 5월10일 화창한 봄날이다. 세계적인 반체제 인사, 인권운동가, 최장기 양심수로 널리 알려졌던 ‘야인’ 넬슨 만델라가 합법적 선거를 거쳐 당당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날이다. 역사가 질적으로 달라지는 날이다. 이상적 꿈이 현실로 육화되는 날이다.
오전 9시30분 조찬 연회장인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치와니)의 유니언빌딩에 도착하니 세계 각국에서 온 정상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20세기 역사교과서에 이름이 올라갈 만한 거물들이 내 어깨를 스친다.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고어 미국 부통령,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부인 힐러리,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 리덩후이 대만 총통, 아라파트 팔레스타인(PLO) 의장, 한때 제3세계 지도자 중 가장 뛰어난 사상가로 꼽혔던 니에레레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 디우프 세네갈 대통령,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봉고 가봉 대통령 등등과 잠시나마 얘기를 나눴다.
예정 시간이 조금 지난 11시10분, 취임식이 시작됐다. 남아공의 햇살은 너무 밝고 따가웠고, 진행은 엉성하고 느슨했다. 그러나 인정이 넘치는 축제 분위기였다. 순서에도 없는 것 같은데, 원주민 복장을 한 두 흑인 청년이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 10분간 한풀이하듯 고함을 질러대는 것도 퍽 인상적이었다. 최대의 효율성과 절도 있는 진행이 요구되는 최고의 의식에서, 즉흥 드라마를 허용하는 신남아공의 여유와 저력을 보는 듯했다.
이날 취임식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새로 지은 국가의 메시지요, 다른 하나는 종교 지도자들의 축하 기원 내용이었다. 새 국가는 만델라가 의장으로 일했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일꾼들이 즐겨 불렀던 대안적 희망의 노랫말이었다. 일종의 종말론적 희망을 드러내는 간절한 신앙고백 같기도 했다. “주님,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아프리카의 정신을 더 높이 올리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어 축복하소서!”
노래는 신의 축복을 받아야 할 주체를 차례차례 불렀다. 먼저 ‘우리들의 지도자’를 축복하시어 그들이 창조주를 기억하고 경외하게 해달라고 했다. 다음으로 공복(公僕)들의 공정한 지도력을 소망했다. 그다음 기원 내용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청년들이 인내로 기다릴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젊은이들이 좌절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때론 성급하고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성숙한 인식이 깔려 있는 듯했다. 그다음도 특이했다. ‘아내들과 젊은 여성’을 축복해달라고 노래했다. 인종차별과 함께 성차별을 받아온 이곳 여성들, 그러니까 이중차별로 억울한 고통을 받아온 아내들과 젊은 여성들이 이제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도록 기도하는 듯했다.
뒤이어 ‘모든 교회의 사역자들’, ‘농민과 목축자들’, ‘나라의 하나됨과 자기 향상에 헌신하는 사람들’, ‘교육과 도덕’의 지도력에 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기원하며 노래했다. 나는 우리나라 거대 교회 지도자들의 종교적 세속적 탐욕과 독선이 떠올라 이 기원이 한없이 부러웠다. 노랫말의 마지막 부분도 감동적이었다. “모든 불의와 범법과 죄를 도말하시고,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
무엇보다 나란히 선서하는 두 부통령의 모습이 이채로웠다. 한 사람은 만델라를 도와 인종차별정책의 철폐를 위해 헌신해온 흑인 타보 음베키였고, 또 한 사람은 바로 직전 백인통치체제에서 남아공의 대통령이었던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였다. 참으로 희귀하고 멋진 정치적 융합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만델라 대통령이 선서를 했다. 자신을 27년간이나 감옥에 가뒀던 체제의 대통령과 함께 선서를 하는 그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할 터인데, 겉으로는 모두가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정말 부러웠다. 그 성숙한 열림의 자세, 바야흐로 흑백의 대결과 증오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아름다운 무지개의 시대, 관용과 평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생각이 나를 조용하게 전율시키고 있었다. 과연 한반도의 냉전 대결은 언제나 종식되어 저 무대 위에서처럼 평화와 관용의 무지개 시대를 우리도 구가할 수 있을까, 왜 우리에게는 만델라와 데클레르크 같은 지도자가 없는가!
유대교 지도자, 무슬림 지도자, 힌두교 지도자의 평화 기도에 이어 마지막으로 투투 대주교가 마무리하듯 축복 기원을 했다. 모든 다른 종교를 이웃으로 보는 아름다운 관용의 물결이 모든 이의 가슴속으로 스며 흐르는 듯했다. 흐뭇했다.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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