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0월19일 국회에서 박계동 의원(민주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은닉을 증명하는 서류를 들어보이며 사건을 폭로했다.(왼쪽) 이로 인해 국민들의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노 전 대통령은 10월27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눈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오른쪽) 문민정부 시절 최대 스캔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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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94)
1995년 10월18일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김영삼 대통령의 오랜 ‘집사’로 불리는 장학로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통령께서 나더러 내년 봄 총선에 출마하라고 하셨단다.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장 실장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난 92년에 대통령께서 내게 운명을 같이하자고 하셔서 나는 서울대도 그만두지 않았습니까? 며칠 전 고향 선영에 다녀왔는데, 그곳 부모님 묘지 비석에 김 대통령이 친히 써주신 비석 글씨를 다시 보며 새삼 운명 같은 것을 느꼈지요. 그런데 국회의원 출마 말고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대통령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장 실장도 잘 아시겠지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표를 얻기 위해서는 원칙을 가볍게 여기거나 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 짓을 할 수 없습니다. 표 가진 사람들이 모두 다른데 이들 모두를 기분 좋게 해주려다 보면, 자연히 원칙을 버리게 되지요. 나는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일에 아주 서툰 사람이지요. 대통령께 나중에 내가 종합적으로 말씀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그러자 김 대통령으로부터 23일 예정인 유엔 총회에 다녀온 뒤 이달 말께 다시 연락을 하겠다는 전언이 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10월19일 박계동 의원(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깜짝 놀랄 폭로를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무려 4000억원이라는 엄청난 비자금을 ‘40분의 1’인 100억 단위로 쪼개어 여러 은행에 예치했다는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노 대통령 쪽은 즉각 부인했다. 만일 이 폭로가 사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해마다 800억원씩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한 셈이다. 국민의 혈세를 매일 2억2000만원씩 거둬들였다는 뜻이다. 그는 대통령이었나, 대도령(大盜領)이었나 의문이 들었다. 문민정부가 어찌 이 고발을 가볍게 처리할 수 있겠나. 5·18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본질적으로 부패한 집단임을 스스로 증거해주고 있다. 10월22일부터 노 전 대통령의 은닉 비자금 윤곽이 언론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현우 경호실장이 문제의 300억원을 관리해온 장본인이라고 했다. 이는 비자금 스캔들의 일각일 뿐이다. 이 사건이 5·18 고소고발 사건과 맞물려 있어 문민정부의 목줄을 죌 것 같다. 김 대통령이 어떻게 두 문제를 풀어갈지 걱정된다.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그 역시 과거 군사권위주의 비리 사슬의 포로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현 정부를 ‘7공화국’이라 부르지 않고 ‘김영삼 정부’라고 부르게 된 까닭을 대통령은 깊이 이해해야 한다. 10월24일 최형우 전 민자당 사무총장, 김정남 전 수석과 함께 하얏트호텔에서 저녁을 했다. 5·18 문제와 비자금 문제는 동근(같은 뿌리)의 문제임을 나는 지적했다. 김 대통령을 설득해 정치개혁의 발동을 새로 거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최 전 총장은 민주계를 약화시킨 김 대통령을 원망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날 낮에는 소산(김현철)의 장인인 김웅세 사장(롯데월드)과 함께 오찬을 했다. 나는 그가 서울대 건설본부장을 할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는 사돈인 김 대통령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와 사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듣긴 했으나, 그런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김 사장은 사위의 오만불손함을 지적하며 거산과 소산, 부자간의 갈등도 얘기했다. 한때 소산은 아버지로부터 토사구팽당했다고 투덜거렸단다. 소산은 정말 무서운 젊은이다. 권력욕은 부자의 천륜까지 넘어설 만큼 무서운 것인가. 9월27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앙꼬 없는 찹쌀떡 꼴이다. 비자금 조성 과정, 사용 내역, 그 처리 문제에 대해 전혀 구체성과 성실성이 없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액의 비자금이 필요했는지 해명을 못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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