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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0.10 20:00 수정 : 2012.10.11 15:36

1997년 1월21일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 이홍구 신한국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만나 여야 영수회담을 열고 있다. 96년말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처리에 항의하는 범국민적인 비판 여론을 무마하고자 마지못해 모여 앉은 자리여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07

1997년 1월11일. 요즘 세계 주요 언론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영국의 <더 타임스>, 독일의 <슈피겔>까지 지난해 12월26일 새벽 6시 집권 신한국당이 마치 군사정권 때처럼 국회에서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사실을 겨냥했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민주화는 제도적 개혁을 통해 이뤄져야 하는데 한국 정치지도자의 의식은 아직도 권위주의적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 가운데 나를 가장 놀라게 한 비판은 미국 자동차노조 위원장인 스티븐 요키치의 말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 뻔뻔스러운 반노동자적 행동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 김영삼 대통령은 차라리 민간복을 벗어버리고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이전 독재자들의 장군복으로 갈아입어라!”

정말 창피한 일이다. 문민시대에 이 무슨 망신인가. 문민정부는 일종의 집단적 치매에 걸린 것 같다. 지난날 군사정권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심지어 그 짓을 반복하고 있다. 유신 말기 국회에서 김 대통령을 부당하게 추방했던 그 벌거벗은 군사권력을 여당 대표(이홍구)를 앞세워 지금 그가 휘둘러대고 있다. 지난 1월7일 그의 연두기자회견을 지켜보며 나는 속으로 ‘아! 이 문민정부가 마침내 정치적 치매에 걸렸구나’ 하고 외쳤다. 더욱 딱한 건, 모든 치매환자가 그렇듯, 정작 정부만 정치적 치매에 걸린 것을 모른다는 슬픈 사실이다.

1월15일 퇴근길 종로와 을지로 일대가 막혔다. ‘노동관계법’ 날치기에 항의해 민주노총을 비롯해 총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이 연일 거리로 쏟아져나오고 있다. 꼭 10년 전 6월의 모습이 떠오른다. 10년 만에 역사가 후퇴했단 말인가! 김 대통령이 과연 야당 지도자 시절 진정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다만 대권을 잡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잠시 이용한 것은 아닌가.

1월17일 전직 장군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 퍽 이례적이고 흥미있는 자리였다. 김진기 전 헌병감,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김영관 전 해군참모총장, 이들은 모두 신군부에 의해 억울하게 고통을 당했다. 장 장군은 처음에는 몹시 조심하는 듯했지만 차츰 말문이 열리자 전두환과 그 부하들이 앞으로 꾀할 문제들을 심각하게 염려했다. 김 대통령 퇴임과 더불어 지금까지 와신상담해온 ‘전씨 일당’이 하나회의 복귀와 조직 강화를 꾀할 것이며 보복작전을 구사할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그런데 정작 김 대통령은 군장성들이 모두 자기에게 충성하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낙관한다고 걱정했다. 이들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이래저래 와이에스는 퇴임 뒤 외롭고 괴로운 삶을 살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민주화세력, 평화인권세력도 지난날처럼 그를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의 외로움은 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 같다.

김 대통령이 마지못해 여야 영수회담을 수용했다. 과연 그 자리에서 노동법 파동을 풀어낼 수 있을까? 김 대통령은 영수회담에서 정치 승부수를 던질 터인데, 당장은 이길지 몰라도 멀리 보면 역사의 패배자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1월21일. 청와대에서 영수회담이 열렸다. ‘3김씨’가 다시 만난 것이다. 아직도 한국 정치는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멀었다. 흥미롭게도 김종필(제이피) 자민련 총재가 문민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으로 나왔다. 날치기로 통과시킨 법안들을 원천무효화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의 길은 없다고 그는 강경하게 말했다. 자민련 대변인은 신한국당이 날치기 통과에 대해 먼저 사과한 뒤 재발 방지를 보장해야 한다고 여당을 옥죄었다. 안기부법에 대한 태도에도 제이피가 디제이보다 더 강경했다. 이 또한 역설적으로 흥미롭다. 안기부(중앙정보부)를 창설해 한국 민주화를 옥죄었던 그가 이제 반대로 안기부법을 개악했다며 ‘민주 투사’ 출신 김 대통령을 옥죄고 있다니.

한완상 전 부총리
영수회담을 마친 뒤 제이피는 와이에스가 아직도 현실을 모르고 있다고 비판했다. 디제이는 오히려 성과 있는 회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었다. 그의 이런 너그러움이 계산된 꼼수에서 나온 것 같은 인상이 들어 뒷맛이 개운치 않다. 제이피가 차제에 이철승 전 의원 등과 함께 수구연합을 구성해 민주연합세력과 민주적으로 경합한다면 오히려 한국 정치가 좀더 예측 가능해지지 않을까. 여하튼 영수회담은 떨떠름하게 끝나고 말았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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