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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0.21 19:52 수정 : 2012.10.22 09:07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필자는 재야 시절부터 교유해온 야권 정치인들과 디제이피연합 정부가 들어선 뒤 내각책임제 추진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나눴다. 사진은 97년 12월19일 김 대통령 당선인이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에서 김종필 선대회의 의장 부부 및 박태준 자민련 총재와 함께 당선증을 펼쳐든 채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14

1998년 2월5일 오랜만에 김종완·정대철·이부영 등 재야 출신 정치인들과 만났다. 김 전 의원(평민당)을 볼 때면 늘 ‘작은 고추가 맵다’는 전통적 지혜가 떠오른다. 93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을 쿠데타로 규정했을 때 국회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야당에서 황인성 총리에게 5·16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었는데 그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만섭 국회의장은 황 총리에게 대답하라고 촉구해도 여전히 우물쭈물하자 질책을 한 뒤 일시 정회를 선포했다. 그런데 그 순간 김 의원이 황 총리 앞으로 걸어나왔다. 황 총리 바로 뒷자리 국무위원석에 앉아 있던 나는 그를 주의깊게 관찰했다. 그는 준엄한 자세로 총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꾸짖었다. 황 총리는 당황해하더니 김 의원이 물러가자 내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김 전 의원의 그 ‘기품있게 당돌한’ 행동을 보고 나 역시 놀랐다. 국회 사진기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꼭 찍었어야 할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날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예견되는 정계개편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내각제를 선호하는 세력과 대통령제를 고집하는 세력 사이에 이견이 생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분단된 오늘의 상황에서는 대통령중심제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지도력으로 힘있게 해결해나가야 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중대과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야 하고, 나아가 이 과제들을 풀어갈 구체적 정책 프로그램들을 다듬어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가지 과제는 바로 민주화의 진전, 경제회생, 한반도 평화 구현이다. 그 엄청난 냉전 유지와 강화 비용을 민주화와 경제회생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지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다. 대통령에게 탈냉전의 신념과 철학이 요구되는 것도 바로 이런 지도력이 요청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지난 문민정부의 한계를 겪으면서 나는 그런 강력한 지도력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했다.

한데 새 정부가 막 들어서려는 지금 나는 왠지 불안해진다. 김 당선인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정대철 전 의원도 디제이가 냉전세력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하기야 평생에 걸쳐 누구보다 냉전세력에게 시달려온 디제이이기에 그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부와 사회 곳곳에 깊이 내면화된 냉전체제의 해체에 소극적이 된다면 결코 역사 진전은 기대할 수 없다.

2월10일 김근태 의원(새정치국민회의)과 함께했다. 그는 며칠 전 김 대통령과 식사를 했다고 했다. 퍽 쓸쓸하게 보였다고 했다. 그 역시 디제이와 와이에스가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 동서화합을 이룩하고 나아가 민주세력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곧 권력구조 문제로 정치권이 다소 어지럽게 재편될 터인데 이런 때일수록 민주세력 대동단결이 절박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깨끗하고 순수한 제의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저렇게 정갈하게 생각하는 정치 지식인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흐뭇했다.

이날 오후에는 미국 동남부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메이저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투션>의 키스 그레이엄 기자가 찾아왔다. 레이니 전 주한 미대사가 소개했단다. 고향 사람이 온 듯 반가웠다. 그는 김대중 당선인의 정치비전에 대해 물었다. 나는 디제이가 당면한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는 경제에 대해 일가견을 갖고 있는 탁월한 정치인인 만큼 경제를 회복시키면서 주춤했던 민주화를 더욱 진전시키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간 악화된 남북관계를 새 대통령께서 크게 개선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또 자주 삐걱거렸던 한-미 관계도 원만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레이엄은 불쑥 디제이의 새 정부에 참여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했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데게 되고 너무 멀리 있으면 추워지지요. 그래서 적당한 거리에 있는 것이 안전하고 좋지요. …”

한완상 전 부총리
2월12일. 점심때 윤철상 의원(새정치국민회의)과 만났다. 그 역시 디제이의 비서요 충직한 가신이기에 나는 지난번 권노갑 전 의원에게 했던 얘기 중에 디제이가 이 시점에서 와이에스를 보호해주어야 할 이유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윤 의원은 내 의견을 경청했다. 그는 권 전 의원의 주거가 병원으로 제한돼 있다며 김 대통령이 그를 풀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방송대 총장실에 돌아오자마자 청와대 김기수 비서실장에게 전화해 김 대통령께 ‘주거제한 해제조처’를 요청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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