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9월25일 필자는 4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방송대 총장에서 퇴임했다. 앞서 9월9일 경남 마산 방송대 준공식에 참석한 필자가 직접 쓴 붓글씨를 새긴 기념비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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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28
1998년 9월25일 나는 조용히 퇴임식을 치르고 한국방송대 총장에서 물러났다. 지난 9월9일 경남 마산 방송대 준공식 때 나는 큼직한 바위에 직접 붓글씨로 이렇게 새겼다. ‘온 겨레가 우리의 학생/ 온 가정이 우리의 교실/온 나라가 우리의 교정’. 남쪽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방송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과 방향을 그리고 그 본질을 영원히 밝혀두고 싶었다. 9월27일. 일요일이었지만 박한식 교수(미국 조지아대학)가 북한 가는 길에 들렀다며 연락을 해와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만났다. 라종일 안기부 차장을 먼저 만나고 왔다는 그는 ‘라 박사가 냉전수구세력을 의식해서인지 퍽 소심해진 것 같다’고 했다. 총리, 외무부 장관, 통일부 장관 모두 뚜렷한 반공주의자들인 디제이피(DJP) 체제의 틈새에서 라 박사 같은 자유주의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박 교수와 이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지금 김대중 대통령은 문민정부의 냉전대결 방식을 버리고 ‘햇볕정책’을 펴는데도 왜 남북관계가 냉전적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가. 나는 디제이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생각했다. 화합과 사회통합의 명분을 앞세워 냉전세력과 원칙 없는 전문가나 테크노크라트와 손잡고 개혁정치·탈냉전 대북정책을 펼쳐내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임을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칙 없는 타협들이 여기저기서 춤을 추듯 한다. 10월2일 4년간의 총장의 짐을 벗고 난 뒤 처음으로 운동을 하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두가지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모교인 에모리대학 체이스 총장이 보낸 편지였다. 대학 이사회에서 내년 5월 입학식 때 나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주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김 대통령과 이홍구 현 주미대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세번째 영광이다. 또 하나는 광주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관련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통지가 왔다. 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공동피고인 전원이 받게 된다고 한다. 당연하고 명분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좀 쑥스럽기도 하다. 그때 그 사형수가 대통령이 됐으니 세상이 확실히 변하고 있구나. 10월12일에는 광주에 내려가서 광주시장과 ‘5·18 광주항쟁 지원’ 담당자를 두루 만났다. 앞으로 ‘5·18’ 유공자로 인정받으면 갑종의 의료보험 혜택을 준다고 한다. 국회에서 법이 통과되면 5·18 관련자들은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힐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보낸 어이없는 통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연금을 지급받으려면 신원조회를 해야 하는데 경찰청 감식과에서 보내온 기록에는 내가 아직도 사면·복권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단다. 나는 84년 8월15일 광복절 특사로 복권이 돼서 미국 망명에서 돌아올 수 있었고, 그해 가을엔 서울대 복직도 했는데…복권이 안 됐다면 어떻게 문민정부의 통일 부총리로 임명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튿날 아침 라종일 안기부 차장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말하고,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에게도 알려 속히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오후에 김 장관은 알아보니 행정착오가 있었다며 사과전화를 해왔다. 84년 당시에는 수기로 기록을 했는데, 이후 컴퓨터 등록 때 누락된 것이란다. 한심한 경찰이다. 아직 민주개혁은 멀었구나 싶었다. 이날 저녁에는 후농(김상현)의 초대로 예춘호·한승헌 선생 등과 함께했다. 우리 모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공동피고인들이니 5·18묘지에 다 함께 묻힐 판이다. ‘살아서 동지, 죽어서도 동지’가 되었으니,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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