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17 19:49
수정 : 2012.12.17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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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뒤 신임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전임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이 나란히 손을 잡고 식장을 떠나고 있다. 필자는 이즈음 민주정부의 맥을 잇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투쟁으로 이뤄낸 민주주의가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되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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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55
2003년 1월 계미년 새해를 희망과 염려로 맞았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한국 민주화는 더욱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가득하다. 한데 무엇인가 불안하다. 그것은 노 대통령이 예측 가능한 기존 정치인 스타일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당선으로 단순히 정부가 바뀌는 게 아니라 정치문화가 확 바꿔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제왕적 대통령의 스타일을 극복해주길 바란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그의 당선을 체질적으로 혐오하는 냉전적 주류세력들의 공격과 비난이 만만찮을 듯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잘 대응해낼 수 있을까 염려된다. 노무현 정부의 통일정책, 대북정책 그리고 외교정책이 어떻게 펼쳐질까 궁금해진다. 그의 주변에 어떤 참모들이 있는지 전혀 모르니 더욱 막막하다.
미국도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어떤 외교정책을 내놓을지 궁금해하는 듯하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우리 새 정부의 대미정책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 같다. 국내 수구냉전세력 역시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노 대통령의 대미·대북정책에 관심을 갖고 냉소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 시사잡지 <타임>은 노 대통령 당선인과 인터뷰한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후 첫 공적 발언으로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이 한국을 미국의 피보호자가 아니라 대등한 국가로 대접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 그는 그의 새 정부가 북한과의 외교적 관계에 대해 미국을 따르기만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나아가 이 회견에서 당선인은 한국이 미국에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부시와 그를 지지하는 네오콘 세력은 이 기사를 유쾌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듯하다.
1월10일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1993년 6월11일 북-미 회담에서 북의 조약 탈퇴 유보를 끌어냈던 ‘제네바 합의’가 10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북한은 당시 합의한 4가지, 그중에서도 특히 첫번째 무력 위협과 사용 배제 원칙이 무시당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못박았다. 부시가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미국 남부지역 특유의 군사문화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을 이라크·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낙인찍은 것도 바로 그런 시각에서 비롯됐다. 그렇기에 노 당선인이 디제이의 햇볕정책을 계승한다면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미묘한 긴장 기류가 흐를 것 같다.
이처럼 예민한 시점에 노 당선인은 서울에 모인 600명의 미국과 유럽의 경제지도자들 앞에서 놀라운 발언을 했다. 1월17일 그는 미국 정부가 북한 당국과 직접 대화해 한반도의 핵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했다. 북한의 대미 협상 의지는 진지한 것이며, 북한이 경제개혁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도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본다고 했다. 새 정부도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뜻이 확인된 셈이다. 부시 정부가 틀림없이 불편해하겠지만 당선인의 발언은 적절하고 용기있다.
2월24일 영국의 <가디언>은 한국의 새 정부 출범에 즈음해 ‘한국 대통령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으로 로그온하다’라는 제목 아래 “한국은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된 온라인 민주주의 국가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나는 이 기사를 보며 해방 직후 혼란기에 영국 언론에서 “마치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필 수 없듯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고 했던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새삼 떠올렸다. 그런 우리가 불과 반세기 뒤에 이처럼 찬사를 받게 된 것이다.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면서 저 어두웠던 70년대 유신독재 상황에서 함석헌 선생께서 뜬금없이 던졌던 희망의 메시지도 생각났다. “만약 하나님이 ‘뒤로 돌아가!’ 하고 명령을 내리게 되면 우리는 대번에 정치 선진국 앞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2월24일 오늘은 디제이의 대통령 재임 마지막날이다. 그런데 공허하고 우울하다. 이 땅의 민주화와 인권, 평화와 정의를 위해 그토록 애썼던 분이기에, 그의 퇴임을 한없이 축하해줘야 하는데 왜 그럴까?
민주화를 위해서 용기있게 싸우는 일은 괴롭고 아플지언정 신명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세우는 일은 더욱더 어렵다는 사실을 지난 10년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2월25일 노무현 16대 대통령의 취임을 마음껏 축하하면서 민주주의가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되기를 기원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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