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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27 19:45 수정 : 2013.01.27 19:45

1951년 오재식은 피난지 부산 기독학생 모임에서 평생의 반려자 노옥신을 만났다. 노옥신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한국 기독교의 개척자들인 송창근(왼쪽)·김재준(오른쪽)·한경직 목사와 인연을 맺었다. 사진은 송·김 목사의 1920년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학 시절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16

오재식의 평생 동지이자 동반자인 노옥신은 1933년 10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부친 노병희와 모친 김선부의 3남5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제법 큰 사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초등학교 때 신의주에서 진남포로 이사한 뒤 광복 전인 43년 서울로 내려왔다. 혜화초교를 졸업한 뒤 무학여중 5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왔고 이듬해 강원용 목사의 기독학생 모임에서 재식과 만나게 된 것이다.

재식이 강 목사를 부산에서 처음 만난 것과는 달리 옥신은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서울 신당동에 살며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마침 김재준 목사가 세운 경동교회도 같은 동네여서 자주 다녔던 것이다. 당시 강 목사는 주일학교 교사였다. 그래서 옥신은 한동안 강 목사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옥신은 ‘강 선생님’이 좋아 무학여중에 들어가서도 경동교회에 계속 다녔고 기독학생회 활동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원래 옥신의 집안은 신의주에서부터 한경직 목사와 인연이 있었다. 한 목사는 온 집안 사람들이 다니던 신의주 제2교회의 목사였다. 그래서 진남포를 거쳐 서울로 내려와서도 한 목사와 계속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45년 10월 한 목사가 월남해 중구 저동에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전도교회를 개척하자 부친도 적극 동참했다. 말하자면 김치복(전 대한화재 사장)·김치선(전 숭실대 총장)·최창근(전 영락학원 이사장)씨 등과 함께 영락교회의 창립 신도였던 것이다. 옥신은 지금도 베다니전도교회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옥신의 부친이 신의주에서 운영하던 금정상회는 규모가 상당하고 점원도 많았다. 김치복 장로는 당시 점원 중 한명이었다. 좋은 성품과 탁월한 경영수완을 알아본 부친은 그에게 재산을 떼어주며 독립(동윤산업사)을 시켜주었다. 김 장로는 평생 동안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부친을 ‘주인님’이라 부르며 보살폈다. 월남한 뒤 부산에서 식품 군납 등으로 자산을 모은 그는 54년 대한화재(지금은 롯데손해보험)를 인수할 때 부친에게 지분을 떼어 대주주로 이름을 올려주었다. 옥신은 김 장로의 배려를 평생 고마워했다.

그런데 김 장로는 46년 단신으로 월남한 직후 돌림병인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린 적이 있었다. 지금은 배탈 정도로 가벼운 병이지만 위생환경도 치료시설도 열악했던 당시에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했다. 혼자인 그를 돌봐줄 사람이 없자, 옥신의 부친은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때 그 뒷바라지를 도맡아 한 사람이 옥신의 올케(장인화)였다. 올케는 가족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특히 소독에 신경을 썼는데, 아무튼 김 장로는 몇개월 동안 옥신의 집에서 요양을 한 끝에 무사히 회복할 수 있었다. 신의주 시절부터 김 장로를 아꼈던 한경직 목사는 그때 하루도 빠짐없이 자전거를 타고 옥신의 집을 찾아와 병세를 살폈다. 그래서 어린 옥신은 한 목사도 같은 식구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옥신이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도 부친이 세우고 온 가족들이 다니던 영락교회를 마다하고 굳이 혼자서 경동교회 출석을 고집한 데는 강 목사의 특별한 총애가 큰 몫을 했다. 강 목사는 똑똑하고 말도 예쁘게 잘하는 옥신을 무척 귀여워했다. 어느날 그는 옥신에게 교내 웅변대회 참가를 권하고는 ‘인간혁명’이란 제목의 원고까지 손수 써주며 맹훈련을 시켰다. 그 자신 탁월한 선동가였던 그는 연설할 때 어느 대목에서 탁자를 치고, 목소리를 높이고, 손을 올려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꼼꼼하게 지도했다. 그 덕분인지 옥신은 교내 우승은 물론, 서울대 법대 주최로 열린 전국웅변대회에서도 1등을 차지해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고 오재식 선생
지금은 사회참여적 진보신학의 맥을 잇는 경동교회와 보수적 복음신학의 대표 격인 영락교회가 대별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뿌리는 같은 쌍둥이다. 45년 말 주로 북쪽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까닭이기도 했고, 창립 당회장인 김재준 목사나 한경직 목사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동문이자 조선신학교(한신대의 전신) 교수여서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광복 직후 역시 프린스턴신학교 동문인 송창근 목사와 김·한 목사는 미 군정청과 교섭해 일제가 버리고 간 천리교 소유의 신사터를 조선신학교 소유로 불하받았다. 그리고 그 터에 각자 교회를 세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의 천리교본부 자리에는 송 목사가 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 영락동의 서울 본부 자리에는 한 목사가 베다니전도교회(현 영락교회), 장충동의 서울 지부 자리에는 김 목사가 야고보전도교회(현 경동교회)를 열어, 45년 12월2일 동시에 첫 예배를 드렸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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