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에 입학한 오재식은 강원용 목사가 지어준 ‘프레시맨클럽’ 이름으로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며 이화여대에 합격한 노옥신과 연애도 시작했다. 사진은 당시 보수산 아래 자리한 피난민 천막촌으로, 전시연합대학인 서울대와 이화여대의 임시 천막 교사가 있던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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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17
한국전쟁 중에도 학업은 계속되었다. 대학입시도 곧 치러질 예정이었다. 오재식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부산항 부두에 나가 하역 일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미군들이 버린 다 떨어진 군복에 너덜거리는 군화를 신은 재식의 모습은 새까맣게 말라 영락없는 노동자였다. 하지만 재식은 배고픔을 참아가며 공부에 몰두했다.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조차 부족하자 코피를 쏟는 날이 잦았다. 드디어 입학시험날이 다가왔다. 15명의 기독학생모임 동기들이 모두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모두 다 대학에 합격했다. 재식은 서울대에, 노옥신은 이화여대에 합격했다. 15명이 모두 합격을 하자 이들을 지도했던 강원용 목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도 각자 동아리를 만들어 모임을 계속하라고 권했다. 강 목사는 “너희는 이제 신입생이니까 프레시맨이라고 하면 되겠다” 하면서 그동안 이름도 없었던 모임을 ‘프레시맨 클럽’으로 정해주었다. 프레시맨 클럽에는 재식과 옥신을 비롯해 김정환 이태주 노동준 이광호 김명숙 김순명 김명자 이양춘 박민자 김정자 조명화 김경식 등이 있었다. 강 목사는 1945년 12월 김재준 목사와 함께 갓 설립한 경동교회 운영에 나서는 한편 정계나 교계 등에서 바쁘게 활동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많은 애정을 쏟은 일이 기독학생운동이었다. 특히 연설을 잘한 덕분에 각 학교에서 강연 요청이 쏟아졌는데, 강연을 하고자 전국의 각 학교를 돌면서 학생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46년 강 목사는 기독학생운동을 강화하고자 ‘신인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처럼 새로운 인간형의 필요성을 절감한 상황에서 만든 조직이었다. 신인회는 고등학생 신인회와 대학생 신인회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 학교의 기독학생들 중 핵심 멤버를 뽑아 만든 조직이었다. 재식이 기억하는 신인회 선배로는 양우석 이상설 조동빈 박세웅 이규상 등이 있다. 프레시맨 클럽은 강 목사가 그 신인회 다음으로 조직한 모임이었던 셈이다. 프레시맨 클럽의 구성원들은 각자 학교가 달랐지만 매주 모임을 했다. 주로 책을 한 권 정해 읽고 와 독후감을 나누고 기독학생운동의 방향이나 정세 등에 대해서도 폭넓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전공이 다르니, 때론 자신의 전공에 관한 내용을 준비해 와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가끔 강 목사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늘 그들 뒤에는 강 목사가 있어 챙겨주었다. 장소는 그때그때 여건이 되는 곳에서 모였다. 선배의 사무실이나 집에서 모이기도 했지만 주로 산을 이용했다. 전쟁으로 현실은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젊은 그들에겐 각자의 꿈이 있었다. 산에 가면 전쟁이 주는 참혹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친구들과 함께 서로의 꿈을 키우며 토론하는 동안 그들의 희망도 점점 자라났다. 프레시맨 클럽 구성원들은 그때 하도 자주 산을 찾아다녀서인지 대부분 산을 좋아했다. 프레시맨 클럽 구성원이 남자 7명, 여자 8명인데다, 한창 젊은 나이였으니 심심치 않게 연분홍 기운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부부의 연으로까지 맺어진 것은 재식과 옥신뿐이었다.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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