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8월 서울 환도 뒤 오재식이 서울대 기독학생회 회장을 맡았을 당시 한국 기독교계는 보수-진보 신학논쟁 끝에 예수교장로회(예장)와 기독교장로회(기장)로 분리되는 갈등의 시기였다. 사진은 장공 김재준 목사가 기장 출범 직후 53년 8월5일 설교하는 장면이다. 사진 장공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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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0
1953년 기독학생회는 강원용 목사 중심의 진보파와 당시 국회의원이던 황성수 선생이 지도하는 보수파로 나뉘어 있었다. 황 선생은 진보파 학생들에게 “너희는 타락한 놈들이다. 설교도 안 듣고 기도도 안 한다”며 손가락질하곤 했다. 이런 대립의 배경에는 조선신학교(한신대의 전신)가 있었다. 38년 9월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주한 외국 4개 선교부(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연합교회)에서는 결별을 선언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폐쇄해 버렸다. 이에 참배를 지지한 서북 세력들 주도로 40년 2월 평양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기호지역 출신들도 김대현 장로의 거액 헌금을 바탕으로 40년 4월19일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에 조선신학원을 세웠다. 초대 이사장은 김 장로가 맡았고 장공 김재준 목사와 송창근 목사 등이 전임교수로 취임했다. 45년 교장이 된 장공은 조선신학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때까지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주도해온 보수주의 신학교육을 지양하고, 학문의 자유를 허용하는 새로운 교육을 지향했다. 47년에 이르자 이런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의 대립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신학생 중심으로 ‘성서유오설’(성서에도 오류가 있다는 설)을 가르치는 교수 밑에서 배울 수 없다며 장공 축출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장로교의 내부 갈등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52년 장로회 총회에서 장공을 파문해 버렸다. 이에 맞서 장공을 지지하는 젊은 신학도들 중심으로 54년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출범하면서 기존 예수교장로회(예장)와 나뉜 것이다. 바로 그 무렵 오재식은 서울대 기독학생회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교단이 둘로 나뉜 것이 재식의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다만 교단 분리에 따라 학생 조직도 강 목사가 지도하는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와 황 선생이 이끄는 청년면려회(CE)로 갈라지게 됐다. 면려회 쪽에서는 연합회 쪽을 보고 ‘김재준파, 강원용 조무래기’라고 노골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한때 황 선생은 연합회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진보파의 지도자인 강 목사는 캐나다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결국 기독학생회 선배인 조요한·양우석 선생이 연합회를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양 선생은 황 선생에 맞서 연합회를 지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재식은 바로 옆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강 목사가 없는 동안 연합회 지도총무는 신성국 목사가 맡았다. 조선신학대에서 이름을 바꾼 한국신학대를 졸업한 신 목사는 당시 해군 중위로 군목이었다. 군복을 입은 채로 기독학생회 학생들의 활동을 살피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어서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그래서 보수파와 맞서는 일도 몇배나 힘들었을 터였지만 그는 회장인 재식에게나 다른 학생들에게 한번도 속내를 말한 적이 없었다. 연합회는 종로에 있는 대한기독교서회 빌딩 안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직후 한동안 재식은 김정문 선생의 후원 덕분에 하숙집을 구하기는 했지만 집에 들어가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하숙비가 밀려 밥 한 끼 먹는 것도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공부도 해야 했고, 짬짬이 과외를 해서 생활비를 벌면서 기독학생회 회장까지 맡고 보니 사실 편히 잠잘 시간조차 없는 나날이었다. 그는 연합회 사무실로 출근하다시피 했고 때로는 밤샘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실은 하숙비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다 의자를 붙여놓고 겨우 눈만 붙이는 새우잠을 자느라 몸은 늘 뻐근했다.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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