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부터 서울대 기독학생회 회장을 맡은 오재식은 대학시절 내내 전국기독학생회연합회(기독학생회총연맹의 전신) 사무실에 살다시피 했다. 사진은 54년 7월 나온 연합회 소식지 창간호로, 하기대회 준비위원 명단에 위원장 양우석, 총무부원 오재식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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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1
1953년 이후 졸업할 때까지 오재식의 서울대 종교학과 시절은 기독학생회 활동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의 곁에는 늘 노옥신이 있었다. 기독학생회에서는 행사도 많았고, 알려야 할 일도 많았다. 다른 회원 학생들이 옆에서 도와주긴 해도 늘 일손이 달렸다. 회장이자 기독학생회연합회 사무실에 상근을 하다시피 했던 재식이 도맡아 해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재식을 만나러 온 옥신이 자연스럽게 도와주곤 했다. 특히 옥신이 글씨를 잘 쓰는 덕분에 행사 알림 포스터를 도맡아 만들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함께 전단을 돌리기도 하고,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기도 했다. 포스터 붙이기는 상당히 번거로운 작업이어서 혼자 하기 어려웠다. 그런 날이면 옥신은 출근이라도 하듯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왔고, 둘은 풀을 쑤어서 커다란 깡통에 잔뜩 담은 뒤 포스터를 한 아름 안고 거리로 나섰다. 풀을 칠하는 것은 옥신의 몫이요, 포스터를 붙이는 일은 재식의 일이었다. 전란의 폐허 속에 대중교통수단이 변변찮았던 그때는 웬만한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어다니며 전봇대에 일일이 포스터를 붙였다. 그나마 나무 전봇대여서 종이가 잘 붙었다. 재식보다 키가 한참 작은 옥신이 종종걸음으로 앞서가 전봇대에 풀을 칠하면, 재식이 뒤따라와 포스터 뭉치에서 한 장씩 빼내 붙이는 분업이 착착 이뤄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거리를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손도 잡고 어깨를 부딪치게 되면서 가난한 젊은 연인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 시절 재식은 또 한 사람의 멘토와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바로 김관석 목사다. 당시 연합회 사무실이 있던 서울 종로2가의 건물에는 교계 출판사인 대한기독교서회가 있었다. 김 목사는 52년부터 서회의 주간을 맡고 있었다. 훗날 62년 김 목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를 맡게 되면서 재식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운석 김관석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다. 그는 도쿄신학교 유학 중에 태평양전쟁이 터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군사훈련 중에 탈영하여 숨어 있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 함흥이 소련군의 통치지역에 들어가면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이다 투옥이 됐고, 한달 동안 수감생활을 한 뒤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49년 미국 시러큐스대학에서 유학한 뒤 귀국해 한국전쟁 중에는 조선신학교(한신대의 전신) 조교수로서 연세대·이화여대 등에서 강사를 하며 기독교서회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55년 재식이 연합회 사무실을 오가며 김 목사를 처음 만났던 때 그는 뉴욕 유니언신학대를 마치고 다시 서회에 복직했을 무렵이었다. 재식을 비롯한 기독학생회 동료들 눈에 보이는 김 목사는 한마디로 멋쟁이였다. 옷도 반듯하게 잘 차려입는데다 치켜올리는 손짓 하나마저 멋있어 보였다. 게다가 그는 그 시절 보기 드문 지프차조차 몰고 다녔다. 남루한 차림에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니던 대부분의 가난한 대학생들에게 그는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890년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서회는 광복 이후 한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출판 업무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 파란색 윌리스 지프차도 그 구호물자 중 하나였는데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늘 주차장에 세워뒀다가, 유학시절 운전을 배운 김 목사가 돌아오면서 전용차가 된 셈이었다.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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