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8월 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뽑힌 오재식(뒷줄 왼쪽 둘째)은 진보와 보수파의 분열과 갈등 속에서 통합을 이끌어내느라 늘 분주했다. 사진은 피난 시절 강원용 목사(뒷줄 오른쪽 셋째)가 주도한 기독학생모임 회원들이 52년 대학에 입학한 뒤 결성한 프레시맨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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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2
1955년 들어 강원용 목사의 주도로 조직된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연합회)는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휴전 직후 캐나다로 유학을 갔던 강 목사는 그즈음 뉴욕의 유니언신학대에서 공부를 계속하고자 미국으로 옮겨가던 무렵이었다. 사실 강 목사가 있던 시절에도 보수파 쪽에서는 ‘강원용이라는 신신학파 인물이 지도하는 기독학생운동을 막아야 한다’며 연합회를 자신들이 지배하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소속 교회 가운데 보수파 기독학생들이 모여 만든 ‘학생신앙동지회’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들도 그 전까지는 연합회에 속해 있었다. 이들의 뒤에는 황성수의 청년면려회를 비롯한 보수파 그룹이 있었다. 55년 3월 정기총회를 준비하고자 연합회 임원들과 학생 실행위원, 이사회 대표들이 모여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학생 실행위원들이 카를 바르트의 책을 소개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예장 대표로 참석한 한 목사가 “그런 책을 소개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그리하여 찬반토론을 벌인 끝에 표결을 했고 결국 가결이 됐다. 그러자 그 목사는 “교단 대표이사의 바른 지도를 따르지 않는 학생회와 함께할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그런데 그해 8월 정기총회 때 개회 선언을 하기 위해 회원보고를 하려고 하자, 기독학생신앙동지회에서 주동해 보수 쪽 학생들이 말없이 총회장에서 퇴장을 해버렸다. 당시 연합회 이사장인 강신명 목사와 미 장로교 선교사인 구의령 목사를 비롯해 초청 강사로 참석한 김형석 교수, 지도총무인 신성국 목사 등이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별도의 독자적인 총회를 열기로 계획을 세워 준비까지 다 해둔 상황이어서 돌이킬 수가 없었다. 결국 남아 있는 연합회 학생들만으로 회의 순서에 따라 총회를 마쳤고, 새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때 재식은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지도총무인 신 목사는 보수파로부터 공격을 막아내고 연합회를 지키기 위해 드러내지 않고 힘을 보태고 있었다. 청년면려회 쪽의 도전을 가장 많이 막아준 이는 강신명 이사장이었다. 일찍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프린스턴신학대에서 유학한 그는 귀국해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영락교회에서 사목하다 그 무렵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었다.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 예장 최초의 교회였고, 보수파 지도자인 한 목사와도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는 기독학생운동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잘 돌봐주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만난 강 목사는 재식이 새문안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데도, 훗날 재식의 아이들 이름까지 일일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서울신학교에서 강의하며 혜화동교회를 겸임하고 있던 정진경 목사도 기독학생회에 애정이 많았다. 정 목사는 개신교 안에서도 상당히 보수적으로 분류되는 성결교 교단 소속이었지만, 늘 재식과 기독학생회를 지지해주었다. 먼 훗날 97년 재식을 월드비전으로 이끈 사람도 바로 그였다.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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