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들어 진보-보수 분열을 겪은 대한기독학생회연합회는 57년 7월 신흥대(현 경희대)에서 하기대회와 연합총회를 열고 ‘한국학생기독교운동’(KSCM)으로 새출발했다. 55년부터 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오재식은 이때 군복무 중이어서 총회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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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3
1955년 10월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간사 초 탄의 방한을 앞두고 열린 명동정책협의회를 주도한 그룹은 ‘한국기독학생운동협의회’였다. 아직은 임시협의회 상태였는데, 그 배경을 이해하자면 48년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를 결성할 당시의 상황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출범 당시에는 가장 규모가 컸던 와이엠시에이(YMCA)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학생들도 연합회에 적극 가담했다. 그런데 그 뒤로 두 조직은 각각 산하에 자체 학생연맹을 조직하게 됐다. 그래서 연합회에는 두 조직에 속하지 않는 단체의 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49년 9월 국내 기독학생운동 조직과 국제연대기구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세계학생기독교연맹의 아시아 총무인 윈번 토머스를 초청해 두 ‘와이’와 연합회가 공동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세 조직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협의체로서 기독학생운동협의회를 조직할 것과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 가입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렇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이 논의는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가, 54년 3월에야 협의회가 다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오재식도 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명동정책협의회에 참석했다. 이때 와이더블유시에이의 총무인 박에스더 선생과 박영숙 선생이 간사 자격으로 나왔고, 와이엠시에이 대표는 강문규 선생이었다. 명동정책협의회에서는 당장 세 단체가 통합하기는 어려우므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협력하면서 통합을 목표로 삼자는 느슨한 동의로 마무리했다. 그러다 59년에 이르러 세 단체의 통합을 위한 전단계로서 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면서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로 공식 출범하게 됐다. 재식은 그사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이 협의회의 초대 간사를 맡았다. 이는 그가 학생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했던 기독학생운동에 실무자인 간사로서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첫 계기였다. 아무튼 명동정책협의회는 애초 두 ‘와이’와 연합회 사이의 협력과 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한시 기구였지만, 동시에 보수-진보로 분열된 연합회의 통합에도 힘을 실어준 결과가 되었다. 세 단체의 협력과 통합에 앞서 연합회 자체의 통합이 더 급선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55년 총회에서 빠져나간 보수파인 기독학생신앙동지회 쪽 학생들도 연합회(KSCF)란 이름을 계속 쓰고 있었다. 또 56년 7월 연합회는 회장인 재식의 사회로 중앙대에서 7차 총회를 열었고, 신앙동지회 쪽에서는 장익태를 회장으로 뽑아 신흥대(경희대의 옛 이름)에서 또다른 총회를 했다. 이처럼 분열된 상태로 두 개의 총회를 한 뒤 8월 중순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세계대회가 열리자 한국 대표로 김천배·김현자·신성국 3명이 참석했다. 이때 연합회의 지도총무이기도 했던 신성국 목사는 연합회에서 분리된 보수 쪽 조직의 상황을 소개하고 이들의 조속한 통합을 위해 연맹에서도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연맹에서는 긴급 수습위원회를 소집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의 각 교단·선교회 책임자에게 연합회의 재연합을 위해 적극 협력할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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