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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05 19:47 수정 : 2013.02.05 19:48

1950년대 들어 진보-보수 분열을 겪은 대한기독학생회연합회는 57년 7월 신흥대(현 경희대)에서 하기대회와 연합총회를 열고 ‘한국학생기독교운동’(KSCM)으로 새출발했다. 55년부터 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오재식은 이때 군복무 중이어서 총회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 중에서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3

1955년 10월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간사 초 탄의 방한을 앞두고 열린 명동정책협의회를 주도한 그룹은 ‘한국기독학생운동협의회’였다. 아직은 임시협의회 상태였는데, 그 배경을 이해하자면 48년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를 결성할 당시의 상황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출범 당시에는 가장 규모가 컸던 와이엠시에이(YMCA)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학생들도 연합회에 적극 가담했다. 그런데 그 뒤로 두 조직은 각각 산하에 자체 학생연맹을 조직하게 됐다. 그래서 연합회에는 두 조직에 속하지 않는 단체의 학생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 49년 9월 국내 기독학생운동 조직과 국제연대기구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세계학생기독교연맹의 아시아 총무인 윈번 토머스를 초청해 두 ‘와이’와 연합회가 공동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세 조직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협의체로서 기독학생운동협의회를 조직할 것과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 가입하기로 합의를 했다. 그렇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이 논의는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가, 54년 3월에야 협의회가 다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오재식도 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명동정책협의회에 참석했다. 이때 와이더블유시에이의 총무인 박에스더 선생과 박영숙 선생이 간사 자격으로 나왔고, 와이엠시에이 대표는 강문규 선생이었다.

명동정책협의회에서는 당장 세 단체가 통합하기는 어려우므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협력하면서 통합을 목표로 삼자는 느슨한 동의로 마무리했다. 그러다 59년에 이르러 세 단체의 통합을 위한 전단계로서 협의회를 구성하게 되면서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로 공식 출범하게 됐다. 재식은 그사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이 협의회의 초대 간사를 맡았다. 이는 그가 학생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했던 기독학생운동에 실무자인 간사로서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첫 계기였다.

아무튼 명동정책협의회는 애초 두 ‘와이’와 연합회 사이의 협력과 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한 한시 기구였지만, 동시에 보수-진보로 분열된 연합회의 통합에도 힘을 실어준 결과가 되었다. 세 단체의 협력과 통합에 앞서 연합회 자체의 통합이 더 급선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55년 총회에서 빠져나간 보수파인 기독학생신앙동지회 쪽 학생들도 연합회(KSCF)란 이름을 계속 쓰고 있었다. 또 56년 7월 연합회는 회장인 재식의 사회로 중앙대에서 7차 총회를 열었고, 신앙동지회 쪽에서는 장익태를 회장으로 뽑아 신흥대(경희대의 옛 이름)에서 또다른 총회를 했다. 이처럼 분열된 상태로 두 개의 총회를 한 뒤 8월 중순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세계대회가 열리자 한국 대표로 김천배·김현자·신성국 3명이 참석했다.

이때 연합회의 지도총무이기도 했던 신성국 목사는 연합회에서 분리된 보수 쪽 조직의 상황을 소개하고 이들의 조속한 통합을 위해 연맹에서도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연맹에서는 긴급 수습위원회를 소집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의 각 교단·선교회 책임자에게 연합회의 재연합을 위해 적극 협력할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고 오재식 선생
이에 따라 양쪽의 지도총무인 신성국과 성갑식은 물론이고 학생대표인 재식을 비롯해 김병일·김남현·이대순이 56년 11월28일 1차 예비회담을 열었다. 이틀 뒤 30일에는 교회협의회 주최로 대한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 연합을 위한 합동추진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통해 양쪽은 서로 합심해 회개함과 더불어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연합 조건을 잘 이해하고 협력하여 재연합을 하자는 합의를 하게 되었다. 이로써 분열되었던 연합회는 그해 크리스마스 축하 사업을 함께 열었다. 이듬해 57년 7월에는 2년 만에 함께 연합총회도 열었다. 이때 총회의 명칭을 ‘달리하면서 새롭게 출발하자’로 내세웠다. 연합회의 영문 표기도 ‘한국학생기독교운동’이란 뜻인 ‘코리아 스튜던트 크리스천 무브먼트’(KSCM)로 바꾸었다.

이처럼 분열됐던 연합회의 두 조직이 재연합하는 과정에 적극 나섰던 재식은 57년 봄 대학을 졸업하면서 군 입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정작 연합총회 때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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