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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06 20:04 수정 : 2013.02.06 20:04

오재식은 서울대 시절 ‘알로에 전도사’ 김정문 선생이 조직한 기독교사상연구회 총무를 맡아 평생의 인연을 맺었다. 57년 겨울 결혼한 그의 신혼집 안방에서 김 선생의 알로에 묘목을 맡아 키우기도 했다. 사진은 십대 때부터 앓아온 갖가지 난치병을 알로에로 치료한 김 선생이 83년 경기도 반월 알로에농장에서 집단재배하던 시절.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4

1952년부터 57년까지 오재식의 서울대 시절은 기독학생운동으로 채워졌지만 그를 지탱해준 힘은 기독교사상연구회와 신생숙이었다.

기독교사상연구회는 앞서 소개한 대로 ‘알로에 박사’ 김정문 선생의 주도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가족은 부산에 둔 채 홀로 서울로 올라온 그는 부산에서 강원용 목사를 통해 알았던 기독학생회 학생들과 신인회, 프레시맨 클럽 회원 등을 모아 연구회를 만들었다. 회장을 자임한 그의 헌신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며 자금이며 모든 것을 연구회에 끌어모았다.

그때 부회장은 재식에 앞서 서울대 기독학생회장을 맡았던 정희경(청강학원 이사장)이었는데, 그는 그 시절 “왜 여자라고 부회장을 해야 하나?”라고 따질 정도로 당찬 여성운동가였다. 그래서 결혼에 관심이 없을 듯했던 그는 훗날 김 선생의 친구로 남양알로에 창업주인 이연호 선생과 결혼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기독교사상연구회에서도 재식은 총무를 맡았고, 기독학생회의 선배인 양우석을 비롯해 이교상, 조형균, 이상설, 이연호, 김광일 등의 선후배들이 함께 활동했다.

서울대 철학과를 다닌 이교상은 김 선생과 동갑내기로 특별히 친했다. 그는 인문학적 지식도 뛰어나고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의 교제를 부모가 반대하자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29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조형균은 평생토록 함석헌 선생을 따르는 제자로, 함 선생의 ‘노자’ 강의를 모조리 녹음해 놓았을 정도였다. 아쉽게도 그 녹음테이프는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채 그의 집에 쌓여 있다고 한다. 훗날 한양대에서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된 김광일은 82년 오랜 외국생활에서 돌아온 재식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훈련원장으로서 사회보호법 중 ‘정신병 조항’(전두환 신군부가 반정부 인사를 정신병원에 집어넣기 위해 계획한 이 법은 경찰서장·시장·군수 등의 인정서만 있으면 누구든지 정신병원에 감금할 수 있도록 한 조항) 반대운동을 벌이자 함께 싸웠다. 이 조항은 결국 삭제됐다.

연구회는 당시 코리아나호텔 뒤에 있던 덕수교회 2층에서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어김없이 모였다. 주로 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들었는데 늘 열띤 토론장이 되곤 했다. 늘 최신 사조를 주제로 삼았는데 디트리히 본회퍼, 윌리엄 템플, 에밀 브루너 등의 실천신학 책을 탐독했다.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열정의 청년기였다.

토론에서 도출된 성과물을 모아 매달 회지도 제작했는데 그러자니 비용이 필요했다. 그 운영비를 조달하는 것은 늘 김 선생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가지 사업을 시도했다.

휴전 직후인 53년 후반기에 그는 당시 동숭동에 있던 서울대 문리대 앞에서 외국어 책을 수입해 팔기도 했다. 마땅한 가게도 없어 손수레에 책을 쌓아놓고 팔았는데 주로 일본 책이 많았다. 모두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 때문인지 책을 찾아 읽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다. 지식인과 학생들은 선진국의 지식을 전달해줄 책에 대한 갈망이 더 절실했다. 그래서 철학·문학·역사 같은 인문과학 서적과 자연과학 서적을 주로 수입했는데,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
고 오재식 선생
해 값싼 문고판도 사들였다. 다방면에 박식했던 김 선생은 출판연감을 살펴보고 사람들이 사볼 만한 책들을 ‘족집게처럼’ 골라냈다. 한동안 잘나가던 수입책 노점상은 일본에 송금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김 선생은 굴하지 않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내 결국엔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내곤 했다.

김 선생의 필생의 업적인 알로에 보급 사업에는 재식 부부도 한몫을 했다. 57년 11월 재식은 군 복무 중에 노옥신과 결혼식을 올리고 돈암동에 신혼집을 차렸는데, 어느날 김 선생은 일본에서 가져온 알로에 묘목을 신혼부부의 안방에 부려놓고 갔다. 신혼집이래야 방 2개밖에 없어서 부부는 작은방에서 웅크리고 자야 했다. 김 선생은 그런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부부에게 알로에가 얼어 죽지 않게 불을 많이 때라고 볼 때마다 일렀다. 그 덕분에 알로에는 신혼집 안방을 차지한 몇 달 사이 무럭무럭 잘 자랐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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