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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07 19:41 수정 : 2013.02.08 14:57

오재식은 1954년 서울대 3학년 때부터 사설 인재양성기관인 신생숙에 입주해 안정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진은 숙장을 맡았던 김일남(오른쪽)·오세임 부부가 당시 서울 후암동에 있던 신생숙 대문 앞에 나란히 한 모습. 이들 부부는 훗날 서울 삼양동에서 신생지역사회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5

오재식은 ‘신생숙’을 생각하면 흐뭇한 기억이 더 많다. 신생숙은 1954년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 교수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장학생 기숙시설이었다. 일본의 에도 시절 엘리트 양성기관으로 유명한 쇼카숀쥬쿠(송하촌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박 교수가 사재를 털고 뜻있는 후원자들을 모아 만든 것이었다.

초창기 신생숙에는 서울대를 비롯해 시내 몇몇 대학에서 총창 추천을 받아 선발된 9명이 입주했다. 박 교수의 철학과에서는 특별히 2명을 뽑아 서울대 문리대생이 여럿이었다. 재식을 비롯해 이헌조(전 엘지전자 회장)·설상수(재미·작고)·김일주(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이사장)·최정호(울산대 석좌교수)·노동준 등이었다. 2기에는 이상일(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 이사장)·이학표·문병욱·전순규 등이 있다.

한국전쟁이 휩쓸고 간 상흔은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식처럼 대부분의 학생들이 검정색 물을 들인 군복과 낡은 군화를 사시사철 입고 신고 다녔고, 학생의 필수품이라 할 노트나 필기구도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다.

박 교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노트가 없어 겨우 찾아낸 갱지 이면에다 수업 내용을 적고, 그마저 보관할 데가 없어 접어서 뒷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밑창이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학생들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생활이 남루해서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만 몇 명이라도 제대로 먹이고 재우면서 공부할 수 있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박 교수는 맨처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주석균에게 그런 생각을 내보였다. 일제 때 행정 공무원으로 일한 전력이 있던 그는 이승만 정권 때는 농림부 차관까지 지냈다. 그는 당시 후암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받아 살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8·15’ 직후 버리고 떠난 집들을 나라에서 접수해 공무원들에게 나눠주던 시절이었다. 그 집은 굉장히 넓어 방도 여럿에 부엌이 두 개나 됐고 세미나실로 사용할만한 큰 공간도 있었다. 마침 자녀가 없이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았다.

평소 그 집을 눈여겨 봐둔 박 교수는 주씨에게 학생들의 비참한 상황을 전한 뒤 “내가 학생들을 모아 숙을 운영하고 싶다. 경비는 내가 만들어올 테니 당신집 일부를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승낙한 주씨 부부는 방 두 개와 부엌 하나만 쓰고 나머지 공간을 모두 비워주었다.

이렇게해서 박 교수는 9명의 학생들을 뽑고 철학과 제자인 김일남에게 숙장을 맡겼다. 사실 김씨는 갓 결혼한 신혼이었고 그 부인 오세임은 국회의원의 딸로 귀하게 자라 학생들 뒷바라지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박 교수를 존경한 까닭에 기꺼이 맡은 것이었다. 새 색시인 그의 부인은 8명 청년들의 빨래며, 청소며, 음식 장만까지 온갖 궂은 일을 별 싫은 기색없이 잘 해냈다.

신생숙을 누구보다 좋아한 것은 바로 재식이었다. 52년 부산 피난시절 입학한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도 내내 동가숙 서가식을 해왔던 그였으니, 편한 잠자리에 세끼 밥에 깨끗한 의복까지 무상으로 제공받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돌이켜보면 홀로 추자도를 떠났던 12살 이후 온전한 가정에서 지내지 못했던 그는 대학 3학년에 이르러서야 안락한 집을 찾은 셈이었다.

신생숙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해야 했다. 여러 명이 합숙을 하는 터라 대청소를 하게 되면 각자 성격이 드러났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도 있고, 하기 싫어서 슬슬 빠지는 사람도 있었다. 신생숙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주요한 관심사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김 숙장을 비롯 신생숙의 이사들이 속해 있던 ‘면학동기회’의 선배들이 찾아와 학생들을 격려하며 폭넓은 대화도 나누었다. 그때 자주 왔던 이가 서영훈·강영훈 전 국무총리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도 당시 와이더블유시에이 간사를 하며 가끔 들렀다. 박 교수는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정권에 참여해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면서 대표적인 관변 철학자로 변신하지만, 신생숙 시절에는 학생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받았다.

고 오재식 선생
‘지식과 정신교육의 용광로’로 주목받았던 신생숙은 3기까지 모두 25명을 배출하고 운영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 3년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재식은 80년대 국외 활동을 끝내고 돌아와 동기 이헌조에게 신생숙을 부활시켜보자고 제안해 한동안 논의한 적도 있었지만 서로 바빠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이씨는 은퇴한 뒤 2010년 해체 위기에 처한 성균관대 ‘실시학사’에 사재 70억원을 남몰래 기부해 재단법인으로 회생시켰다. 그는 신생숙 시절을 묻자 너무나 독실한 기독청년이었던 재식에게 일부러 술을 먹이기도 했고, 자주 놀러오던 ‘여친’ 옥신을 재식이 ‘병아리’라고 부르자 동기들 모두 따라 불렀던 추억을 들려주기도 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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