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맨 오른쪽)은 1957년 대학 졸업 직후 입대해 육군 정훈학교에 배속됐다. 유학 자격을 딴 덕분에 1년간만 복무한데다 곧바로 미 제1군단 홍보부로 파견된 덕분에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사진은 당시 홍보부 담당 한국인 장교·동기 3명의 기자와 함께 영자신문을 편집하는 모습.
|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6
오재식은 1957년 2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52년 입학 동기인 ‘연인’ 노옥신은 56년 이미 이화여대를 졸업했지만 그는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했던 까닭에 1년 늦었다. 신생숙에 들어간 3학년 때부터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대부분 입주 가정교사 등으로 직접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게다가 그는 기독학생회 일에 급하게 필요하면 애써 모아둔 돈을 털어 남몰래 막곤 했다. 재식이 학비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서서 도와준 사람이 김정문 선생이었다. 김 선생은 기독교사상연구회를 같이 하면서 재식의 형편을 살피고 있었던 까닭에 곤경에 처할 때마다 여러 차례 도와주었다. 하지만 재식이 등록금이 없어 졸업을 제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옥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복한 형편이었던 옥신은 그동안 튼튼히 모아둔 용돈을 재식에게 건넸다. 하지만 재식은 그 돈을 받지 않았다. “네가 준 돈으로 어떻게 내 학비를 내느냐”면서 손사래를 쳤다. 옥신도 “그럼 이 돈은 어떻게 하느냐”면서 물러서지 않았지만 재식은 “그럼 기독학생회에다 헌금을 해라” 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옥신은 졸업을 한 뒤 곧바로 동구여상에 영어 교사로 취직을 했다. 반면 재식은 졸업도 하지 못한데다 군대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쳤다. 앞날에 대해 고민하던 재식에게 어느 날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 들렸다. 당시 문교부가 실시하는 해외유학시험에 합격을 하면 군 복무 기간을 단축시켜 준다는 정보였다. 시험 날짜가 촉박했지만 재식은 시험에 응시했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군 입대를 했고, 유학시험 덕분에 1년 동안만 복무하면 되는 혜택을 받았다. 재식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육군 정훈학교(국방정신교육원의 전신)로 배속받았다. 이곳은 군인들의 정신교육을 담당하는 정훈장교와 지휘관들을 교육하는 학교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원용 목사가 정훈학교 교장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내가 아끼는 놈인데, 잘 좀 부탁해”라고 언질을 넣었던 모양이었다. 그 무렵 주한미군 쪽에서 한국군에 요청이 왔다. 제1군단에서 발간하고 있는 영자신문의 한글판 제작팀을 선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군은 그 영자신문을 한국 사병들에게도 나누어주고자 했다. 당시 제1군단의 지휘 아래 한국군 3대 사단에 3만명 정도가 속해 있었으니, 영자신문 한글판 발간은 꽤 규모가 큰 작업이었다. 마침 그 선발 임무는 정훈학교에 전달됐고 재식을 포함한 3명이 제작팀으로 뽑혔다. 이를테면 ‘카투사’가 된 셈이었다. 제1군단 홍보부에서 이들의 지휘를 맡은 한국인 육군 대위까지 모두 4명이 한글판 신문을 편집하게 됐다. 이들은 그날부터 제1군단에서 영자신문 기사를 쓰는 홍보부 소속 미군들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미군들도 모두 대학 졸업생인데다 졸병이었다. 나이도 비슷한데다 함께 먹고 자며 공동생활을 하게 되니 그들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재식은 정훈학교 배속받자마자 선발된 까닭에 이병 계급이었지만 신문기자 임무를 수행하는 데 계급장은 필요 없었다. ‘사단장을 인터뷰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기자라는 표시를 모자에 붙이고 프레스 완장을 둘렀다. 인터뷰나 취재를 하러 다닐 때는 지프차도 부대에서 마련해줬다. 사단장을 만날 때도 이등병 모자를 벗고 인사만 하면 곧바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신문 제작 작업은 조금은 번거로웠지만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우선 재식과 동기들이 한글로 기사를 쓰면 미군들이 영어로 번역했다. 반대로 영어로 된 기사는 재식과 동기들이 한글로 옮겼다. 한글을 영어로 번역할 때면 미군들에게 하나씩 보여주면서 고쳐나갔다. 재식과 동기들은 또래 미군들과 함께 거의 24시간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영어 회화도 익숙해졌다.
고 오재식 선생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