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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13 19:37 수정 : 2013.02.14 21:00

1958년 봄 군복무를 마치고 취직을 서둘던 오재식은 건강검진에서 결핵 판정을 받아 한동안 치료를 해야 했다. 당시 광주 제중병원에 입원한 그를 세심하게 보살펴준 결핵전문의 여성숙 선생은 또 한명의 평생 은인이다. 사진은 60년대 제중병원의 환자 대기실(왼쪽)과 전남 무안의 한산촌에서 2010년 93회 생일을 맞은 여 선생의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8

1957년 겨울 오재식과 노옥신은 서울 돈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재식이 복무하는 미 제1군단이 의정부에 있어서 되도록 가까운 곳에 마련한 것이다. 본채 뒤뜰에 행랑채로 지어진 두 칸짜리 셋방이었다. 그나마 옥신의 교사 월급으로 세를 낼 참이었다. 옥신의 집에서는 마지못해 허락한 결혼이라 한 푼의 지원도 없었고, 옥신에게도 그동안 모아 놓은 목돈이 없었다. 재식을 도와줄 것을 우려한 부친이 월급마저 모두 몰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장 결혼사진도 찾지 못했다. 그나마 두 사람의 딱한 사정을 눈치 챈 지인의 도움으로 며칠 뒤 유성온천을 다녀올 수 있었다. 재식은 그길로 다시 군대로 돌아갔고, 아내라는 이름만 얻었을 뿐 옥신은 홀로 지내야 했다.

이듬해 58년 봄 재식이 제대를 한 뒤 부부는 광희동 수구문 근처의 작은 방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는 셋방 계약기간이 6개월 단위여서 보잘것없는 살림을 손수레에 싣고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다. 다시 안암동으로 옮겼을 무렵 재식은 한국타이어에 취직을 했다. 애초 국비유학시험 합격 자격으로 군복무를 짧게 한 만큼 그는 제대한 뒤 유학을 떠나야 했지만 생계를 위해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타이어 입사를 위한 건강진단서를 제출하고자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은 재식은 뜻밖의 진단을 받았다. 가슴 엑스선 검사에서 폐결핵 양성 판정이 나온 것이다. 그 시절 폐결핵은 거의 불치병에 가까웠으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취직은 고사하고 당장 치료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마침 강원용 목사의 동생인 강형용 박사가 서울대 의대 교수여서 그나마 결핵약을 손쉽게 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약만으로 치료를 기대하기 어려운데다 전염 우려 때문에 격리·입원 치료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재식은 결핵환자를 잘 치료하기로 소문난 광주 제중병원(광주기독병원의 전신)으로 가기로 했다. 당시 국내 유일한 결핵전문병원이기도 했고 일찍이 구한말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계여서 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옥신을 봐서라도 빨리 건강을 되찾아야 했다.

59년 12월 재식이 도착한 제중병원은 그야말로 결핵환자들로 넘쳐났다. 1911년 개원 때부터 결핵과 한센병 환자를 치료해온 제중병원은 일제 말기 강제폐쇄되었다가 51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 콜링턴에 의해 결핵요양원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재식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당시 국내 유일한 여성 흉곽내과 전문의이자 결핵 전문의로 소문난 여성숙 선생을 담당 의사로 만난 것이다. 여 선생은 다른 환자에 비해 초기였던 재식이 혹시라도 중환자 병실을 배정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었다. 그 덕분에 재식은 두달 남짓 만에 치료를 끝내고 퇴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옥신은 동구여상에서 교사로 일하며 저녁에는 과외까지 해서 치료비를 감당해야 했다. 그 때문에 광주까지 가볼 여유도 없었던 그는 틈틈이 밑반찬을 챙겨 보낼 뿐이었다. 또다시 헤어져 살게 된 부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혹시라도 재발 위험이 있으니 따로 지내는 게 좋겠다는 여 선생의 권유로 재식은 퇴원한 뒤에도 세검정에 따로 방을 구해 몇달간 혼자 지냈다.

1918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여 선생은 18살 때 집을 뛰쳐나와 독학으로 일본에 유학해 의사가 된 의지의 신여성이다. 한국전쟁 때 전주예수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하며 결핵환자를 돌보기로 결심한 그는 제중병원에서 7년 남짓 근무한 뒤 65년 아예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야산에 전 재산을 털어 결핵요양원인 한산촌을 세웠다. 강한 전염성 때문에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가난한 결핵환자들이 마음 놓고 치료를 받게 하고 싶어서였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맑은 땅에 아름다운 동산을 꾸미고 집을 지어 결핵환자들과 같이 사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98년 은퇴할 때까지 2000명이 넘는 환자를 구제했다.

그는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의 권유를 받아 80년 개신교 독신여성 수도공동체인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꾸린 뒤 82년에는
고 오재식 선생
전 재산을 기증했다. 서로를 ‘언님’이라 부르는 디아코니아자매회는 한산촌에서 시작해 목포·신안 등 전남 도서지역에서 농어촌 개발사업이나 결핵환자 자활사업, 빈민구제 사업 등을 펼쳤다. 지금은 영성치유를 위해 충남 천안에 ‘영성과 평화의 집’을 세워 수도공동체로 운영되고 있다.

82년 오랜 국외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재식은 천안에 있는 디아코니아자매회로 찾아가 여 선생과 기쁨의 재회를 하기도 했다. 여 선생은 봉사와 함께 영성수련을 한 덕분인지 여전히 고운 모습이었다. 88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첫 수상자로 세상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2000년 들어 노인요양원으로 바뀐 한산촌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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