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방직 민주노조는 1978년 2월21일 대의원 선거를 통해 새 지부장을 선출하기로 했다. 이총각을 비롯한 4명의 후보가 등록해 선거운동을 시작하자 회사 쪽은 노골적으로 그의 낙선운동을 시도했다. 사진은 77년 3월30일 수습 대의원대회 때 집행부를 지원해준 섬유노조본부의 이광환 국장이 개표를 진행하는 모습. 왼쪽부터 이총각·박영숙·이광환·안순애.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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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44
동일방직 민주노조 이총각 집행부는 1978년 2월21일을 대의원 선거일로 정하고 섬유노동조합본부(섬유본조)에 승인요청을 하는 등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조합원 탈퇴사건 이후로 회사 쪽의 부당노동행위가 뜸해진 터라 이총각은 이번 선거는 무사히 치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날짜를 잡고 준비에 들어가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올라왔다. 퇴근하는 조합원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새마을 교육이랍시고 끌고 다니더니, 2월13일엔 홍지영이라는 사람이 쓴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라는 책자가 작업 현장에 뿌려졌다. 내용은 도시산업선교회(산선)가 빨갱이 단체와 연결돼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홍지영은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왜 빨갱이인가?’라는 제목으로 교육을 하고 다니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본조에서 선거일을 4월께로 미뤄달라는 연락이 왔다. 동일방직 조합원의 진정서가 접수됐는데 시기적으로 너무 빠르고 대의원 선출에서 인원 배정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조 규약에도 2월부터 4월 사이에 하는 것으로 돼 있고, 꼭 어느날 해야 한다고 규정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날짜는 지부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동일방직 노조 운영규정에는 2월에 대의원대회를 열도록 돼 있었다. 대의원은 25명에 1명꼴이었는데 위사 부서와 직포 부서에 문제가 있었다. 직포과의 조합원은 60여명이었고, 위사 쪽은 15명쯤이어서 두 부서를 통합해 3명의 대의원을 선출하도록 상집 회의에서 결정을 내렸다. 직포과와 위사는 작업 현장도 같고 작업 관계도 밀접하므로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부서를 통합하는 등 편파적인 선거방법”이라는 식의 진정서를 냈다는 것이다. 진정인은 다름 아닌 문명순이었다. 이총각 집행부는 선거를 미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밝히고 선거를 계획대로 치를 것을 선언했다. 그러자 본조에서도 더 이상 다른 구실을 찾지 못하고 대회 개최를 승인했다. 동일방직 노조는 2월21일을 대의원 선거일로 공표하고 지부장 후보 등록에 들어갔다. 이총각은 집행부 의견을 수렴해 후보 등록을 했다. 그리고 77년 수습 대의원대회에서 남자 조합원들과 행동을 같이한 박복례를 비롯한 3명도 출마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고조되어 감과 동시에 회사 쪽의 비열한 낙선운동이 점차 가동되기 시작했다. 선거 사흘 전에는 ‘동일방직 노동조합 정상화 투쟁위원회’라는 뜬금없는 조직 이름으로 작성된 유인물이 조장들을 통해 작업시간에 배포되었다. 내용은 현 집행부가 산선이나 가톨릭노동청년회(지오세)라는 용공단체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조가 조합원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활동을 하고 있고 조합원들에게 피해만 입히고 있다고 했다. 조합원을 위한 노조로 만들기 위해 우선 현 집행부 전원을 물리치자는 내용이었다. 정상화 위원 명단에는 예상대로 문명순과 박복례를 비롯해 반조직파 남자 조합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숨막히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어쩌면 선거 결과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77년 4월의 수습 대의원대회 사태 때는 본조에서 파견된 수습 책임위원인 이광환(조사통계국장)이 있어서 집행부에 큰 힘이 됐었다. 이광환은 당시 서울 방배동에 있는 1200명 규모의 섬유제조업체인 동광모방의 지부장으로서 회사 쪽을 상대로 한 투쟁에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막강 민주노조를 이끌고 있었다. 특히 78년 11월엔 동광모방신용협동조합을 탄생시키며 조합원들의 경제생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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