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평론가가 지난 26일 서울 서교동 인문학 카페 창비에서 만난 모습이다. 왼쪽부터 임홍배 서울대 교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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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⑦ 임홍배가 묻고 백낙청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네번째 주자로 문학평론가 백낙청(오른쪽) 서울대 명예교수와 임홍배(왼쪽) 서울대 교수가 작가회의 창립 초기 일화와 <창작과 비평>을 통한 언론인·교수 등 해직 지식인 운동과 연대 흐름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평론가가 지난 26일 서울 서교동 인문학 카페 창비에서 만난 모습이다.
이어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백낙청은
백낙청은 1938년 대구 외가에서 태어났고 원적은 평북 정주다. 고교 졸업 뒤 미국 브라운대에서 영문학과 독문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마쳤다. 20대 중반인 63년부터 서울대 강단에 섰고 72년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74년 파면당했으나 80년 복직했고 2003년 정년퇴임한 뒤 명예교수로 있다.
66년 <창작과 비평> 창간을 주도한 이래 문학평론가이자 편집인으로서 ‘민족문학론’과 ‘분단체제론’을 주창하고 실천해온 진보 지식인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의 이론은 보수와 급진 진영으로부터 동시에 도전과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진보담론의 동력원이 되고 있다. 다수의 문학평론집 외에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1994), <흔들리는 분단체제>(1998),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2006),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2009) 4부작이 대표적이다.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개편한 뒤 부회장과 이사장을 맡는 등 문인운동에도 줄곧 참여해 왔다. 시민방송(RTV) 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지냈다.
▶▶임홍배는
임홍배는 1960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나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훔볼트 대학에서 수학하고, 서울대에서 괴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학생 시절부터 백낙청 선생을 김수영이 말한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가는’ 문학적 실천의 귀감이자 문학 공부의 사표로 삼았다”는 그는 2003년부터 5년간 <창작과 비평> 편집위원으로 백낙청 편집인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10여년간 연구 성과를 총결산한 저서 <괴테가 탐사한 근대: 슈투름 운트 드랑에서 세계문학론까지>를 최근 출간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 <어느 사랑의 실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 여러 번역서와, <황석영 문학의 세계>, <살아 있는 김수영>, <김남주 문학의 세계> 등을 펴냈다.
‘개헌지지 문인 선언’ 서명 받았어요
현실참여운동 참여한 첫 경험인데
내가 선언문 쓰고 낭독도 했지요
그 다음날 긴급조치가 나왔어요
1966년 백낙청 교수가 주도해 창간한 문예지 <창작과 비평>은 문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이 참여하고 교류하는 진보담론의 생산기지가 됐다. 사진은 77년 2월 서울 수송동 동신빌딩에 있던 창비 본사에서 함께한 편집위원들로, 왼쪽부터 염무웅·백낙청·조태일·이오덕·이원수씨.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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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고은, 조직책은 이문구
박태순은 별동대장 노릇 했어요 ‘창비’는 문학운동 후방기지여서
자실과는 일부러 거리뒀어요
70년대 창비는 문단에 그치지 않고
민주민족운동 거점 구실 했거든요 임 자실 출범의 배경을 설명해주셨는데, 출범 때 상황은 어땠나요? 백 자실의 핵심은 고은 선생이었어요. 그런데 고은 시인이지 치밀한 조직가는 아니기 때문에 이문구 선생이 대신 조직책 비슷한 구실을 했어요. 그 무렵 <한국문학>이 창간됐는데, 그 사무실 한구석에서 이 선생이 문인들 연락을 거의 도맡아 했어요. 김동리·손소희 선생 부부도 못 본 척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분들이 워낙 이 선생을 아끼신 덕분에. 그리고 별동대장처럼 온갖 일에 활발하게 뛰어다닌 분이 박태순 작가죠. 그 세 분이 주축이었어요. 염무웅 선생이나 나는 <창작과 비평>을 지켜야 하니까, 준비 과정에 참여했고 염 선생은 선언문까지 썼지만 표면엔 나서지 않았습니다. 고은 선생이 처음부터 선언문도 쓰고 연락도 다 했다, 이렇게 입을 맞췄고, 경찰서에 잡혀가서도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임 ‘창비’ 때문에 전면에 나서기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렇지만 창비가 일정한 교두보 구실을 하지 않았나요? 백 대체로 그렇긴 하지만, 자실 참여 문인들과 창비를 일치시킬 순 없어요. 창비는 어찌 보면 문학운동의 후방기지로서 자실의 일선 활동과 일부러 거리를 둔 측면이 있었고, 게다가 70년대 창비는 전체 민주민족운동의 한 거점이기도 했기에 문단에만 한정되지 않는 영역이 있었죠. 리영희·박현채·강만길 선생 같은 분들이 창비를 통해 많이 활약하셨잖아요? 임 출범 선언 앞서 10월24일 동아일보·동아방송 기자 180여명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고, 이듬해 초 동아 130여명, 조선일보 30여명의 기자가 쫓겨나는 사태가 벌어졌지요. 그때 이미 언론자유 투쟁과 자실 문인들 사이에 긴밀한 공조가 있었을까요? 백 관계가 아주 긴밀해진 것은 기자들이 무더기 해직되면서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투위’가 결성된 다음이지요. 그분들과는 같이 데모도 하고 집회도 하고 그런 관계가 됐어요. 임 자실 출범 직후 11월27일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었고, 선생님께서 거기에 참여한 것 때문에 대학에서 강제 해직되셨지요. 백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서명한 사람 중에 국립대 교수가 둘이 있었습니다. 김병걸 선생은 경기공전 교수였는데, 사표를 안 내실 수가 없었어요. 나는 사표를 안 내고 버티다가 결국 문교부에 의해 파면을 당했는데, 그것 말고는 직접적인 위해를 입은 게 없어요. 그보다 좀 앞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받다가 의문사를 당했지요. 그런 험한 세상인데도 나는 무사했던 것이, 하나는 최 교수 사건의 파장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측면도 있었고, 또 하나는 잠시 동안이지만 언론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를 해준 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임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만, 그때 조선과 동아 모두 사설을 통해 두 분의 해직이 부당하다고 대서특필했지요. 이듬해 교수 재임용법이 만들어져서 76년 2월 말 개학 직전 전국 대학에서 460여명이 해직당하고 78년 4월에는 해직교수협의회(해교협)가 결성되기에 이릅니다. 그 결성선언문에 해당되는 ‘동료교수들에게 보내는 글’을 선생님께서 기초하셨다지요? 백 아마 그랬을 겁니다. 해교협을 만들면서 성래운 선생이 회장, 문동환 선생과 내가 부회장이 됐는데, 문건 쓰는 일들이 대부분 나한테 떨어졌어요. 교수 재임용법을 만드는 데는 내가 일조하지 않았나 싶은데(웃음), 박 정권에서 74년 내 사건을 겪어보니까 교수 하나 파면시킨다는 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문제를 일거에 정리할 묘수로 생각해낸 게 재임용법이에요. 임 78년 6월 전남대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했고, 그 때문에 송기숙 선생이 구속돼서 실형까지 받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선언문을 직접 쓰신 걸로 아는데요, 그렇다면 전국 단위로 거사를 준비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인지요? 백 애초에 송기숙 교수가 창비로 찾아와서 ‘전남대 분위기가 학생들이 교수들한테 돌을 던질 지경이 됐는데 가만있을 수 없다’며, ‘서울에서 나서서 일을 좀 만들어 달라’ 이렇게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해교협에서 문건도 준비해놓고 송 교수한테 연락하니까 전남대 교수 몇 분이 금방 규합됐어요. 그런데 정작 서울에서는 일이 잘 안되는 거예요. 두어 분이 동의했지만, 서울대 변형윤 선생을 뵙고 얘기를 했더니 지금 대학 분위기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진솔하게 잘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성래운 선생이 결단을 내리고 <아사히신문> 기자한테 선언문을 갖다주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길로 바로 광주에 내려가서 ‘전남대 교수들 이름으로만 나간다’고 전하니까 그분들은 청천벽력을 맞은 셈이 됐어요. 그 일로 파면당한 분들께는 두고두고 죄송한 일입니다.
1970년대 후반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하던 무렵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가들. 앞줄 맨 왼쪽 이호철, 셋째 염무웅과 민영, 둘째 줄 왼쪽 셋째 고은, 신경림, (한 사람 건너) 송기원·이시영, 셋째 줄 왼쪽부터 박태순·조태일, 오른쪽 둘째 백낙청씨 등이다. 투옥 중이던 양성우 시인의 부인 정정순(앞줄 오른쪽 둘째)씨도 함께했다. 작가회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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