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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31 22:10 수정 : 2006.05.31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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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대륙붕 유전개발에 눈을 뜬다. 68~69년 미국 해양연구소와 함께 석유탐사를 벌인 뒤 나온 ‘에머리 보고서’는 고무적이었다. 서·남·동해 대륙붕을 여섯 광구로 나눠 개발계획을 세우는 데까진 별 난관이 없었다. 문제는 제주도 남쪽과 일본 규슈 서쪽에 걸친 지역이었다. 석유부존 가능성이 있는 지층이 가장 두텁다고 평가된 곳이었지만 일본이 걸렸다.

박 정권은 다각적 검토를 거쳐 70년 5월30일 이곳을 한국 대륙붕이라고 선언하는 대통령령을 공포한다. 한국과는 대륙붕으로 이어졌지만 일본과는 심해로 단절돼 있다는 논리였다. 제7광구는 이렇게 태어났다. 일본의 반발은 거셌다. 양국 관계는 경제협력 단절 위기까지 가는 심각한 국면을 맞기도 했다. 곡절 끝에 72년 일본은 공동개발 제안으로 한발 물러섰고, 78년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 협정이 발효됐다.(〈김정렴 회고록〉) 7광구는 한-일 공동개발구역으로 재편됐다.

독재정권의 과대 포장이 곁들여지며 국민들로 하여금 한때 산유국 꿈에 젖게 하기도 했다. ‘제7광구’란 유행가도 나왔다. 그러나 79~88년 7개공을 시추하고, 89~92년에도 탐사를 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기억에서 멀어져 가던 2001년 두 나라는 다시 공동탐사에 나선다. 2004년까지 3~5개의 유망구조를 확인하지만 일본의 소극적 자세 탓에 더 공동탐사와 시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 중국은 인근 지역에서 춘샤오, 핑후 유전을 잇달아 발견했다.

지난주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이 일본 경제산업부 장관에게 공동시추를 다시 제의했다. 미적대다간 7광구에 묻혀 있을지 모를 석유까지 중국이 인근 유전에서 뽑아갈지 모른다는 우려도 깔려 있다. 공동시추가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실망하더라도 희망마저 버릴 건 없다.

김병수 논설위원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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