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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8 20:54 수정 : 2006.07.1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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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오감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것은 ‘보는 것’이다. 촉각이나 미각은 감각기관이 사물에 직접 닿지 않으면 대상을 알 수 없다. 후각과 청각이 미치는 거리도 수 킬로미터를 넘지 못한다. 반면 시각은 찰나를 훑는가 하면, 멀리는 우주를 가로질러 지구에서 20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운에 이른다.

본다는 것은 인식의 결정적 매개이자 지식의 근원이다. 고대에서부터 ‘봄(I see)’은 ‘앎(I know)’을 넘어 ‘살아있음’과 같은 의미였다. 구약의 여호와는 ‘말씀’, 곧 ‘들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약에서 신은 인간(예수)으로 육화함으로써 ‘보이는 존재’가 됐다. 고대 그리스 주석가들은 저승의 신 하데스를 ‘보지 못하는 자’로 해석했다. 로마인들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것, 곧 주목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친모 간통’의 신탁이 실현됐음을 통탄하며 제 눈을 찌른다. 이때 실명은 거세의 은유이자, 시각에 기초한 일체의 지식에 대한 일격이다.(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근대의 ‘계몽’은 무지의 눈을 띄워주는 것이었다. 이미 14세기에 베네치아는 안경렌즈의 중심지였으며, 17세기에는 굴절망원경과 현미경, 정교한 인쇄술이 선보였다. 1895년 뢴트겐은 투시의 시대를 열었고 20세기 후반 들어 자기공명영상(MRI)과 초음파영상이 일반화했다.

시각이 이렇게 중요한 기능이자 욕망이다보니 시각장애는 다른 감각장애보다도 훨씬 큰 제약을 준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허용한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직업선택의 자유’와 ‘사회적 약자 배려’라는 상충하는 법익을 놓고 고심했을 것이다. 생존권을 요구하는 시각장애인들의 목숨을 건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지식과 논리보다 사회적 지혜와 배려가 시급한 때다.

조일준 여론팀장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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